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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심포지움 구마심포지엄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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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수산나
작성일 14-06-1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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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전국 성령쇄신 봉사회 봉사자를 위한 구마심포지엄 2부
 
 1. 첫 시간 강연에 대한 질의 응답
 
세례성사로 우리는 하느님과 양자관계를 맺는다(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계약). 하느님의 영광의 상속자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분의 약속의 상속자들이 된다. 하지만 우리 안에 죄의 상처가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 치유가 필요하고 악의 사슬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2000년 베드로 성당이 있는 바티칸 광장에서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 역사 2000년 동안 교회의 자녀들이 저질러 온 죄들에 대한 고백을 하셨다.  그러시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의 기억의 정화를 위해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께 청하도록 요구하셨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구원은 우리 인생 안에 자리 잡아야 하고 죄는 예수님의 사랑의 불꽃 안에서 씻어져야 한다.  죄가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1.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다.
  2. 이런 믿음은 신실한 통회를 바탕으로 한다.  살인이 저질러졌을 때 어떤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통회하지 않으면 그 살인사건은 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3.  용서해주기.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주고, 죄를 지은 이를 위해 참회하고 용서해주며, 그 사람을 예수님의 보혈과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 잠기게 하는 것이다.
  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승리는 그분의 것이지만 이런 투쟁이 도래해야 한다. 교황 프란치스꼬 1세 께서는  교회가 가야할 신앙의 여정의 다 섯 가지  이탈리아 알파벳 C로 시작하는 각기 다른 요소들을 제시하셨다.   전진(Camminare), 건설(Costruire), 고해(Confessare), 보호(Custodire), 투쟁(Combattere)이다.
마지막 요소가 투쟁이다.  실제로 신앙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유아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은 싸워야 할 투쟁이 존재한다. 교회는 부활성야  전례 중에 세례 갱신으로 신자들을 초대함으로써 예수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침입하는 악마로부터 더욱 굳세지도록 인도하고 있다.
국제 구마사제 협회 창설자이며 회장이신 아모르트 가브리엘 신부님은 1997년 과 2001년 국제 구마사제 협회 심포지엄 중 위의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하라고 나를 부르셨다. 실제로 현재 구마사제들은 위의 주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의 보혈 안에서 죄가 씻기지 않는다면 이 지구상의 죄는 사라지지 않고 재상산 때문이다.  교회가 정화되지 않고서는 효과적으로 복음을 선포할 만한 단계에 있지 못할 것이다. 첫 번째 구마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다. 하느님 말씀의 진리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해방되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요한8,31-32). 사탄은 세상을 속이면서 지배한다. 오늘날 뉴에이지가 유행하고 있는데 우리가 해방되어야 하고 우리가 지닌 최대한의 에너지를 발산해야 하며 본능까지도 발산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사탄의 속임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의 문란으로 인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이 사탄이다. 사탄을 알아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뉴에이지와 사탄주의는 사슬관계다. 사탄주의에서는 하느님이 계명이 우리 각 개인의 자유를 옭아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우리의 자유를 꼼짝 못하게 막아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가르친다. “자유롭고 싶다면 부모를 무시하라.”
하느님께서 명령하신다.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이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모든 욕정과 욕구대로 생활 할 수 없고 자유게 제한을 받는다.  그런데 사탄주의에서 사탄은 원하는 대로 하라고 속삭인다. 실제로 요즘 젊은이들은 “예수는 따분해, 교리를 강요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며, 프리 섹스를 못하게 하지. 그것뿐인가? 디스코장 등등,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너무 많아.” 그런데 사탄은 원하는대로 모두 하라고 하면서 배반하라고 한다.  우리 자유를 제한하는 마지막 다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다. 하지만 사탄주의자들은 지배구조의 최고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살인해야 기회가 주어진다.  즉 자유가 아닌 방임이며 사탄, 즉 잡신이다. 사탄주의는 하느님을 배척하는 뉴에이지의 결론적 논리이다. 자유라는 미명하에 하느님을 배척하고 현대 우리 사회는 잘못된 개념들에 사로잡혀있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런 속임수에 넘어간다. 이런 경우는 구마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필요한 경우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방되지 못하는 이를 위해 구마를 할 수 있다.
 
 
 
 
 
SIMPOSIO 2      
사탄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그의 손에 모든 힘이 달리고”.
 
승리는 예수님의 것
성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 사이에는 투쟁의 시기가 있다고 보여주고 있다. 가끔씩 악마가 지배권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묵시록은 사탄에게 어느 한 시대가 주어지고 이 시기 동안 우리와 대적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전하고 있으며(묵시록 12, 12 참조), 사탄이 발악을 하는 것은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우리가 사는 현대가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케 한다. 사탄이 교회에 저지른 것은 부와 자유, 즉 쾌락과 방종을 제공하면서 단 몇 년 사이에  천 년의 해를 미쳤다.  신앙의 박해를 하는 나라들이 증대하고 있다. 대부분의 중국신자들은 다른 옛 공산국가 신자들처럼 박해 때 세례를 받은 이들이지만 부와 자유라는 의미를 무질서하게 사용하고 쾌락과 방종이 있는 곳은 사탄이 인간을 지배하는 곳이다.
사탄의 활동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다. 즉, 직간접적인 그의 활동을 분석해 보자.
 
- 간접적인 방법:  사탄은 우리를 직접 건드리지는 않지만 몇몇 방법들 예를 들어 무지와 배교, 속임수와 유혹, 과오 등을 무기로 자신에게 복종시키기 위해 간접적으로 접근한다. 이런 간접 활동의 대상이 된 사람은 인생을 잘못된 방향에 맞추고 신앙을 계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이성의 잣대에 바탕을 두며, 공허하고 무용지물인 것을 따른다. 윤리적으로 난해한 행돌을 따르며 불륜에 기초한 인간관계를 맺는다. 또한 거룩한 사랑과 관대함 성실함이 아닌 욕적을 바탕으로 한 결혼생활을 한다. 스위스에서 겪은 일이다. 어느 날 따르디프Tardiff 신부님의 만나러 가고 있었는데 길을 잃어 행인에게 위치를 물었다. 그는 시내 밖으로 몇 킬로미터를 더 가야 한다고 했다. 오래동안 길을 헤매다가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와 다른 행인에게 길을 물으니 바로 옆 길이 아닌가!
얼마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과 존재에 과오를 저지르는지 모른다. 진실이 아닌 것을 바탕으로 인생을 형성하고 잘못된 인생의 주소지들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성 안에 살지 못하면 과오를 범하게 되고 생각지도 못하게  자발적인 죄를 저지르며,  이런 것들은 꼭 악마의 유혹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에 대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고 말씀하시며 따라오라고 하시는 것이다.
 
- 직접적인 활동:
사탄의 희생양이 된 사람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공경하는 형태다. 첫 번째 직접적인 공경은 세가지 유형의 유혹이다.
 
1 – 불결해진 인간 본성, 즉, 육욕 우리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적인 진리 중의 하나는 원죄라는 것이 과거의 잘못으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이 죄의 결과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죄르 인해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증오심과 음란함,  물질에 대한 욕심 등으로 인해 자신의 본성을 더럽혔다. 세례성사 안에서 하느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치유와 어떤 특정하고 부정적인 관계 청산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덕의 실천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기도생활이나 형제애를 실천해보지 않은 사람은 성령의 활동 안에 사는 것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악의 영향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질서라는 요소가 우리를 악을 향하도록 자극하고 있고 우리 모두는 이에 대상이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유년시절, 자신의 부모들로부터 포옹 한 번 받아보지 못했고, 사랑이나 정감, 이웃을 위한 친절 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결혼생활 안에서도 그렇다. 많은 부부들이 사랑을 알지못하고 살아가면서 이런 상처받은 모습과 병든 모습은 유혹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성 베르나르도께서는 사탄이 죄인들을 유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자신의 소유이기 때문이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을 유혹한다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안에서 사탄은 잠잘 시간도 없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 한 여자가 성체를 영하려고  할 때 사탄이 그 여자에게 우스갯소리를 해서 웃게 만들어 예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이들은 음란한 유혹에 시달린다고도 하는는데 특별히 기도할 때 이런 유혹에 시달리다고 한다.  이것은 누군가 기도할 때 상상 영역이 활동을 멈춘 상태이기 때문에 무의식은 그동안 억압해 왔던 상상들이나 생각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상상영역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할 때 더 많은 유혹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막의 거룩한 은수자셨던 성 뽀에맨Poemen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떤 일이든지 형제를 향한 악한 생각을 품었다면 기도 그 생각이 기도중에 너를 방해할 것이다.” 원한이나 증오, 산만한 감정과 절제되지 못한 감정 등 이 모든 것들은 기도 중에 튀어나와서 우리가 하느님께 까지 들어올려지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곤한다.
 
2 –우리 주위에는 세상에 의해 즉 창조된 것들이 더러워지고 무질서한 사회로 인해 하느님께 대항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광고를 하려면 섹스를 언급하지 않으면 광고효과가 없다. 모든 생각이 섹스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혹은 여성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물건들일 수도 있는데 이는 어떤 특정 생산품을 여성들이 구매하도록 하기 위한 상술이다. 남자의 상상을 자극하는 광고도 있다. 예를 들자면, 나체의 여성이 남성에게 맥주를 권하는 광고로써 나체인 상태로 남성에게 맥주를 마시라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남성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자극적인 상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감정적이며 사회적 카테고리와 정치적 관계 등등을 말하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성령에 의해 영감을 얻지 못했을 때 무질서를 유발하고 유혹을 자극한다. 심지어는 세상의 선을 구현하는데 있어서도 자극적인 방법들이 제공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이나 폭력을 통해서다. 생명을 위해 유용한 것이라기 보다는 노예적인 형태이며 저돌적 쟁취를 유발한다.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썼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쿰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도 또 다투고 싸웁니다. .” (야고보 4,1-2).
 
3 – 사탄으로부터. 분명 유혹은 비이성적인 성질의 것으로 부터 발쌩할 때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내 발을 밟아서 아프다는 사실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상대편의 발을 밟고 싶어진다. 이런 반응은 너무 아픈 나머지 고통에 의한 반응이다. 이유가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나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은 사람에게 이유없이 해를 입히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오는 것은 사탄의 짓이다.  카타리나라고 하는 여성이 죽기 직전 며느리에게 고백한 것은 두 번이나 자신의 딸을 죽이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매일 저녁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전쟁이 뚜렷한 이유없이 일어났었다. 세상을 정복하려 했던 히틀러의 야심은 꼭 그의 육이 더럽혀져서만은 아니다. 실제로 히틀러는 악마적 의식을 치루곤 했고 은비주의적 의식을 행하면서 어떤 신비한 힘을 얻고자 했다. 전승에서 전해지고 있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하셨다고 전해즌 성배를 찾아내려고 프랑스의 한 마을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이유도 없이 행인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했다. 어떤 정신적인 질병없이 이런 종류의 유혹을 받은 사람은 사탄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악을 재인식하고 이를 끊어버리면서  예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뉘우침으로 악과 투쟁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뉘우침은 완전하지 않고 오히려 공허할 뿐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죄를 미워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종으로나 써달라며 자학했다.  나는 올해로 사제생활 42년째다. 그간의  고해성사를 집전하면서 많은 이들이 낙태를 했다고 했었다. 이런 고해를 하는 여성 중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낙태의 예를 들었는데 대단히 많은 경우 자신의 부마자라고 오인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실제로 이들은 이런 상처를 마음에 담고 살면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여성이 삶을 살아가면서 절대로 위로받을 수 없는 사실은 자식을 앞서 보냈을 때이다.
 
언젠가 한 여성을 위한 축복기도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자식들 중 35살 된 아들이 암으로 죽은 뒤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자신이 두 번에 걸친 낙태를 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성사적 사죄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평화를 다시 찾았다.  43살 때 자살한 아들을 두었던 여성은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몇 년 전 자신의 사촌여동생을 속여 낙태를 하도록 도왔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사건을 잊지 않으시고 자신을 벌하신다고 여기고 있었다. 자비의 하느님 말씀을 접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드린 뒤에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서 해방되었다
 
 
낙태
낙태를 한 엄마들은  낙태를 절대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죄로 여긴다. 남편들도 고통스러워 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단지 이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세가지 근본적인 이유때문에 나는 오늘 낙태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a – 죄의식.누구든지 낙태를 한 사람을 덮치는 요소로써 자기자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혼여성이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행여 낙태를 경험하지 않았는지 물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를 위한 기도가 계속 진행되면서 과거에 어떤 일어난 일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쌍둥이를 낙태했다고 고백했다.  이런 죄에 대한 사죄를 받을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자 “아니, 안돼요! 다음에 다시 올께요. 오늘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매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통회의 기도와 행위를 하도록 인도하였다. “신부님, 이제 이것이 조금은 성숙해야 겠어요. 나중에 다시 올께요.” 라며 떠나갔다.
 
성령기도회 전국대회가 있을 때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참가한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괴성을 지르면서 꼭 부마자들처럼 행동하곤 하는데 이들을 면담하다  발견되는 점은 낙태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점과 고해성사를 통한 사죄를 받았을 때 다른 방해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용서 해줄 수 있는 권한을 받으셨다. 이를 거부하늕 사람은 하느님께 불순명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그의 말을 들으라.” 고 하시지 않았던가. 즉 그분께 순명하라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분께 순명하고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행동한 것처럼 그분께서 나에게 흰 옷을 입혀주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 번째 이 낙태라는 요소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학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정리하자면 누구든지 잘못을 저질렀으면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거다.
- 그런 말이 있다. 태어나지 못한 태아 생명들은 천사들이라는. 하지만 천사들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잠길 때야만 가능한 것으로써 사랑받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가능한 것이다. 태어나지 못한 아기는 사랑을 받지 못했고, 자신을 사랑을 표현하지도 못한 상태로 죽었다. 태아의 인생은 불완전하고 찢어졌으며 고통에 내버려졌다. 많은 여성들이 머리 속에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린다고 하다가 저지른 낙태문제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이런 현상도 함께 사라진다.
 
b – 부정적인 결과:  가정 안에서 아주 쉽게 낙태가 자행된다. 예를 들어 자녀 중 누군가 거식증이나 심한 우울증 혹은 자살충동으로 고통 당하고 있을 때 어떤 미스테리 한 존재가 그 안에 내재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어떤 부인이 이야기를 했다. 한 아들이 어느 날인가 다가와서 입맞춤을 해달라고 농담처럼 말하고 나서는 묵직한 것을 손에 매달고는 스스로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그 부인은 자신이 두 번이나 낙태를 했기 때문에 자신의 집에서 이런 자살이라는 불행이 자식대에 일어난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떤 다른 엄마는 스물 여섯 살 된 딸을 두었는데 엄마의 과거 낙태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면서 거식증 환자가 되었고, 꿈 속에서 어떤 여자아이가 동생이라며 나타났다는 것이고, 이름이 안젤라 라고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오랫동안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고, 어느 날밤 꿈 속에서 태아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편의 모습으로 변하더라는 것이다. 결국 남편이 아내의 친구와 불륜을 저지르다 임신을 하게 되니까 낙태를 자행했던 것이다.
자살과 낙태는 깊은 연관을 맺는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도시에  다섯 살 된 남자아이가 누군가 자신의 여자 친구 중의 한 명이 죽음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 같다며 몇 달 전부턴 자신은 죽어야 한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어느 날 밤 자는 척 하면서 엄마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고 10층에서 뛰어내렸다. ㄱ 부모는 남자아이가 태어난 뒤 여아 두 명을 더 임신했었지만 모두 낙태를 했다고 했다.
 
이런 자학과 자기파멸적 신드롬은 과거에 분명 어떤 일이 있었음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우울증과 거식증, 자살시도, 알콜중독과 약물중독, 방탕한 생활 등은 자주 낙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가정안에서 자기 파괴에 빠진 구성원이 있을 때, 분명 그 가정안에 낙태들이 자행되었다는 증거다.  이런 현상은 100% 낙태에서만 기인한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이런 현상의 80% 라고 보는 구마사제들은 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건과의 관계는 당사자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상처난 성심의 뜨거운 사랑의 불꽃에  희생된 영혼을 잠기에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관계다.
이런 경우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은 구마가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께 나가는 것으로써 죽음의 승리를 묵과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승리로 이끌어 가신다.  생명을 거부했던 많은 엄마들의 마음 속에는 자식을 잃은 고통과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이렇게 죽은 아기들이 영원한 생명에 들었다는 희망을 더이상 지니지 못하는 의심에 시달린다.
 
베네딕또 16세 교황에 의해 설립된 국제 신학위원회는 지난 2007년  많은 전세계 주교들이 베네딕또 16세 교황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기들의 구원 희망여부에 대한 물음에 따라 회의를 열게 되었다. (이에 대한 테스트는 바티칸 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음).
위원회의 생각은 무엇보다도 세례성사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다양한 구원의 길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물의 세례, 피의 세례, 원의의 세례(부모의 원의에 의한) 등이다. 이런 형태 뿐만 아니라 이런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런 문제는 계시의 차원에서 다뤄져야 하는 것으로써 신낭의 기본 요소들을 담고 있는 몇몇 서간의 귀절들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요소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1 –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1 티모. 2,4).
2 –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1티모. 1,15).
3 –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1티모.  2,6).
요한 복음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ㅜ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요한 6,37-39)
위원회는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태아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고무적이라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결론을 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다면 태어나지 못하고 세례를 받지 못한 아기에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 주기 위해 이름를 지어주고,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으면서 세례를 줄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구원으로 이 아기를 이끌기 위해서다.  예수님의 그 사랑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당신 생명을 매달게 하신 사랑이며 이 사랑이 나에게 도달하듯 태어나지 못한 그 피조물에게까지도 도달해야 한다.  내가 그 사랑에 잠겨있듯이 태어나지 못한 그 생명에게도 그러해야 한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여, 당신의 거룩한 천사들을 보내셔서 죽음으로부터 그 태야의 생명을 구하시고 당신께서 그 태아의 엄마가 되어 주소서. 예수님께 보여주신 그 모성의 사랑을 고통으로 짓이겨진채 이 세상의 생명을 잃은 그 태아를 치유하소서.” 라며 성모님께 그 아기를 의탁드릴 수 있다. 그리고 그 태아를 위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그 죽은 태아가 구원의 좋은 것 안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희생에 잠기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방법으로 주님께 그 태아을 의탁드리는 행위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태아를 거부한 부모의 마음 안에 평화가 를 주시고, 자신들의 아기가 천국의 영광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한다.
여러 엄마들은 이런 과정을 거친 뒤 자신들의 아기들이 하늘로 가는 꿈을 꾸었다고 하고 내면에 지니고 살던 중압감들이 사라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아래와 같은 또 다른 요소들도 따라야 한다. 즉, 악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 이상은 평화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구원이시다. 많은 이들이 낙태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 죄를 통회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런 죄를 자행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라,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낙태로 인해 죽은 아기들이 구원 받았다는 확신을 가졌을 때야 비로소 기뻐하고 삶을 회복하는지 말이다.
 
c – 낙태는 4가지 이혼 사유의 한 가지다. 한 여성이 어쩔 수 없는 낙태를 해야 할 때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물론 처음에 남편을 사랑했었을지라도 낙태이후 점차적으로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 여성의 마음은 “ 내 아이가 죽었는데 남편의 품에서 기뻐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괴롭다. 자연의 섭리를 반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낙태를 경험한 결혼생활은 자주 파국으로 치닫는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인가 한 아내가 점점 남편을 멀리하게 되지 남편입장에서는 행여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낙태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받은 뒤, 낙태를 방관했던 남편을 용서하고 정상적인 결혼생활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나는 사제로서 “낙태를 하셨습니까?”라고 잘 묻지 않는다. 대신에 “혹시 아기를 잃은 적이 있나요?”라고 묻는다. 낙태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 상대방을 단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향해 개방될 수 있는 말을 골라 사용하는 것이 유용하다. 많은 여성들이 이런 죄를 고백하게 될 때 소리를 지른다. 괴로움의 표시이며 해방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런 엄마들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해준다. “오늘부터 자매님은  더이상 죽은 아기의 엄마가 아니라 살아있는 아기, 성모님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의 엄마입니다. 성모님의 품에 그 아기를 드리십시오.”  주교님들은 낙태의 죄를 지었을 때 이를 기워 갚아야 하는데 통회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아기들을 위한 미사봉헌과 시설에 있는 아기들을 위한 봉사나 위탁부모 혹은 양부모 결연 등을 통해 자선행위를 하라고 가르친다.  낙태를 경험한 부모들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저희가 그 아기들을 모두 먹이고 입힐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아 당신께 보내드렸지만 지금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기들을 돕겠습니다. 대신에 당신께서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저희 아이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질문: “임신중절을 한 사람들은 악마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몇가지 관점에서 문제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톨릭교회 교리서는 죽은 이들과 우리와의 관계는 죽음을 계기로 단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낙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 교리서 955장을 보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일치…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서 죽은 형제들과 함께 걸어가는 이들은 그들과 조금이라도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영원한 믿음에 의해 영적 선들의 친교로 더욱 공고히 되었다.” 보았다시피 영의 현실은  저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는 부마관련설보다는 영매현상 즉, 신비술과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겠다.  신비술이라고 할 때, 꼭 악마들과 관계를 맺는 어떤 것이 아니다. 신비술이라 할 때 모든 영의세계를 말하며 여기에는 죽은자들과의 관계도 포함된다.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낙태당해 죽은 태아의 영혼과 그 가족과의 관계는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그 집에서 초월적인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그 관계가 치유되어야 하고, 지은 죄에 대한 해결이 필요하다. 이 관점은 상당히 조심스런 부분이다. 이미 우리는 이런 경우들에서 낙태를 예로 들어 언급했고, 자살이나 그외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거식증 혹은 그외 자살충동 등의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 앞서 해왔다. 다시 말해 자기파멸적 신드롬을 겪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악마적 부마현상에 대해 언급할 때는 그 사람 스스로가 이런 관계를 맺는 것으로써 이 관계는 실제적인 것이다.  죽은자와 산자와의 관계는 죽음이라는 요소를 통해 단절되고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었을 때 그 영혼과 우리와의 관계는 건전한 관계가 된다. 하지만  그들이 고통을 느낄 때 그들과 우리의 관계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두 번째, 시간이 지나도 죄의식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나이가 많은 한 여성이 임종의 순간 거의 말을 못할 정도가 되었는데도 단 한 마디 내뱉은 말은 “낙태, 낙내, 낙태” 였다. 이는 한 가지 예만이 아니다 이 낙태라는 주제는 구마분야에서 아직도 많은 부분 풀어야 할 부분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해방의 가능성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낙태라는 현실 전체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위의 경우는 영매현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 ( 그 다음 부분 녹음 이 잘려나간 이유로 번역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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