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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은사학교 - 제5강의 성령의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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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로사
작성일 14-10-0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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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은사학교
2014.09.15-19 대전 정하상교육관
 
제5강의 성령의 인도와 따름
(자크필립 신부 저, 조안나 번역, 바오로 딸 출판 “성령안에 머물러라”를 주로 참고)
(좋은 내용이 원문에 있습니다. 꼭 구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1. 성덕은 성령의 작품입니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먼지가 빛으로, 쓰레기가 순수함으로, 죄가 성덕으로, 피조물이 창조주로 그리고 사람이 하느님이 되다니! 오, 놀라워라! 그러나 이 일은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이며 자연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느님만이 풍요롭고 놀라운 은총을 통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 우주 전체의 창조도 성덕에 비하면 그다지 걸작은 못 된다.”(성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마리아의 비밀」, 1부 시작 부분)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하신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성덕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인이 되는 것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므로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성인으로 만들어 주시는지 그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지 않고, 우리를 성화하시는 그분의 은총에 최대한 열려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겸손은 가난함을 받아들이는 힘이며,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은 나약한 우리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성덕의 비결은 하느님을 사로잡고 움직이시게 하는 것
 
(1) “사랑의 권능과 끈기는 대단합니다. 바로 하느님 자신을 정복하고 사로잡으니까요. 사랑하는 영혼은 행복합니다. 그 영혼은 하느님을 자기 포로로 만들어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두 얻으니까요. 사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그분께 잘 다가가기만 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실 그런 분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영가 B, 32, 1>)
(2) 굳은 희망과 의탁
“하느님은 끊임없이 당신을 향하고 그분께만 의지하는 영혼의 희망을 매우 높이 평가하시므로 영혼은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십자가의 성 요한 <잠언 119>)
 
2) 성덕에 이르는 지름길은 성령의 영감에 충실함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편안히 놓아두지 말라고 청하여라. 그러면 그대는 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최대한 사랑하려는 열망을 나에게 불어 넣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은 성인들의 기도를 통해 구원될 것입니다. 성덕에 이르는 가장 짧은 길은 성인들의 훌륭한 메시지에서 드러나듯이 성령의 영감에 충실한 것입니다. 파우스티나 수녀도 노력을 한 군데에 집중하라고 조언합니다.
 
 
2. 성령의 인도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내적인 스승이시고, 그 삶에 생명을 불어넣고, 인도하고, 바로잡아주며, 굳세게 하시는 다정한 손님이요 벗이시다.(교리서 1697)
 
성령의 인도는 삶에서 겪는 사건, 영적지도신부의 조언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것을 알아내게 하지만, 더 근본적이고 주목할 만한 방법은 하느님의 은총이 주는 영감靈感입니다.
내적 충동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의 성령의 움직임으로서 하느님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알게 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요청에 동의하면 그것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힘도 주십니다.
 
1) 각 사람이 걷는 성덕의 형태와 길은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자신의 고유한 성덕의 모습을 알지 못하나, 하느님만이 아시므로 영감으로 알려주시고 실행할 힘도 주십니다. 또 그분만이 꽃피우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 모습을 알게 되므로, 완덕의 이미지를 이미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집착’이라는 장애요인이 됩니다.
 
2) 성령의 인도를 알아 차려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 은총의 영감은 많은 덕 중에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어떤 덕을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지를 아는 것으로, 노력의 방향을 잡는 데 매우 요긴하기 때문입니다.
 
(2) 비록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성령의 움직임인 영감에 충실하게 응답하면, 우리에게 더 많은 은총과 힘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두드리며 요청하시는 작은 일에 충실함으로써 지금으로선 할 수 없는 중대한 일에도 충실할 수 있게 하는 은총을 얻게 되는 것은 영적 법칙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감이 우리 힘에 부치고 두려움을 줄 경우에도,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도 동시에 주시므로, 영감에 충실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영감은 우리 지성을 밝혀주는 빛이며 우리 의지를 움직이는 힘으로, 그분이 바라시는 것을 깨닫게 하는 빛인 동시에 그것을 실행할 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을 이룰 은총은 보장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3) 한 가지 은총에 충실하면 또 다른 은총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영감을 잘 사용할 줄 알 때 주님은 또 다른 영감을 주신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은총을 이용할 줄 아는 데 따라 계속 은총을 주신다.”(F.살레시오 서한 2074)
곧 한가지의 은총에 대한 충실은 다른 은총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리는 차츰 성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충실함의 역동성’이라 말합니다.
 
“영감은 성령께서 매 순간 각 사람을 이끄는 데 쓰시는 수단 가운데 하나다. 영감을 식별하면서 따라가는 것은 신심 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F.살레시오< 영적 우정의 편지>818쪽)
 
 
3. 성령의 인도에 따름
 
1) 내적 수용성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실 때 응답하는 유일한 길은 성령께 자신을 여는 것과 그분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받아야 나눌 수 있습니다. 진리와 생명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모두를 받을 줄 알아야 우리가 이웃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성령만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가져다주시고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인 참된 자유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받아들이는 능력인 내적 수용성은, 우리의 나약함을 도우러 오시는 성령께서 비추고 인도하실 때,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따를 수 있게 합니다. 성령의 활동은 은밀하여 늘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 안에 드러나는 ‘성령의 열매’(갈라 5,22-23)를 통하여 차츰 성령의 활동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활동을 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기도에 대한 충실성, 신뢰, 단순성, 겸손,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 감사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에 끊임없이 열린 마음입니다.
순종은 언제나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며, 마음을 넓혀주고 영혼이 주님의 길을 걷는 데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주어, 풍부한 은총이 따라옵니다.
 
2) 체험이 확증하는 영적 법칙이 있습니다.
 
(1) 마음의 자유는 성령의 현존입니다. ‘성령은 불고 싶은 데로 불기에’(요한 3,8 참조) 매우 요구가 많고 힘들지만 성령 안에 유순히 따르는 길은 자유와 행복의 길입니다.
 
(2) 성령의 내적충동을 받아들이면,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빛과 힘뿐 아니라 마치 도유라도 하듯 격려와 평화를 쏟아 부으시어 우리에게 위로를 가득히 채워주는 ‘위로자’이십니다.
 
(3) 우리 마음을 참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받는 선물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실천하도록 영감을 주시는 선善이란 점입니다. 성령의 도유는 성령의 영감에 따라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혼에 퍼져 나갑니다.
 
 
5. 영감을 피어나게 하는 조건
 
성령의 움직임이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 예외적인 것이 아닌 영성생활의 ‘정상적 작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각각의 동물에 다른 본능을 주셨듯이,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영감과 은총도 사람에 따라 빈도나 형태가 다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영성생활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양분을 취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주십니다.
 
삶속에서 영감을 맞아들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혼이 하느님 영감의 충동을 신속하게 받아들이도록 돕습니다. 신학에서나 부르는 열매인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되고 성령의 은총을 받게 된 세례성사로 시작하였으며, 우리의 삶 안에서 맺습니다.
 
1) 찬미와 감사드리기
 
“좋으신 하느님의 은총을 가장 잘 끌어들이는 것은 감사야. 만일 우리가 그분의 작은 호의에 감사한다면 그분은 감동하셔서 서둘러 또 다른 열 가지 은총을 주셔. 그럴 때 또다시 진심으로 감사드리면 그분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은총을 또다시 내려주시지! 이건 내 체험이야. (주느비에브 수녀 엮음, 「권고와 추억」)”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언니 셀린느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 특히 영감의 은총에 대해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면 하느님은 틀림없이 더 많은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찬미는 마음을 정화하고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영감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준비시켜 줍니다.
 
2) 영감을 바라고 청하기
기도 중에 영감을 바라고 청해야 합니다. “제가 무엇인가 결정할 때마다 영감을 주시고, 당신 영감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3) 하느님께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 순종하려는 결심이 항구하고 확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표현하시는 당신의 뜻은 절대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단호해야 합니다.
“불순종을 두려워하기보다 순종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 키워야 한다.”(성 F. 살레시오)
 
4) 자녀다운 신뢰로 순종하는 습관
그분 뜻에 대한 순종은 이미 드러난 그분 뜻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는다.”는 루카 19,26의 말씀처럼, 각 은총에 대한 충실은 더 풍요로운 새로운 은총을 얻게 됩니다. 주의를 다해 성령의 영감에 순종할 때 더 풍요로운 영감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반적인 뜻을 드러내는 것은 성경의 십계명, 교회의 가르침, 우리 소명과 직업에서 고유하게 요구되는 것 등입니다. 계명이나 신분상의 의무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행할수록 하느님께서 더 많은 영감으로 갚아주십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충실하려는 진지한 열망이 우리 안에 있다면 하느님은 당신 성령의 영감을 더 많이 주실 것입니다.
일상적 의무에 소홀하다면 하느님께 특별한 영감을 청한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그 청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 공동체나 가정이나 사회에서 마땅히 순종해야 할 모든 기회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응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맙시다. 마음에 들 때만 사람에게 순종하는 이는 성령께 순종할 자격이 없습니다.
 
5) 자아 포기
‘삶의 사건들에 대한 순종’은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잊기 쉬운 순종입니다. 이 사건들은 우리 지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하느님의 지혜안에서 그분이 허락하셔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하느님은 바라시진 않으나 허락하시며, 그 상황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괴롭히더라도 우리가 신뢰와 평화 속에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기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순응은 악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악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지혜에 순응하라는 것입니다.(예: 유다의 배반과 빌라도의 비겁함)
 
‘삶의 사건들에 대한 순종’은 믿음으로 자녀다운 포기와 신뢰의 태도를 하늘의 아버지께 지니도록 초대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삶의 사건들은 주관적 해석의 위험이 없기에 결국 하느님의 뜻을 가장 확실하게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슬리는 일들 앞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경직된 반응을 보이면서 하느님을 불신한다면 성령께서 우리 삶을 이끌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이 못 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온전히 순응하지 못하는 어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이 순응이란 말은 우리를 완전히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운명론의 관점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에 신뢰하며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고통스러운 사건과 직면했을 때 억지로 참아내는 수동적 체념이 아닌 적극적 선택으로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위해 바라시는 모든 것을 선택합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위해 바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주님 뜻에 동의하여 자유로운 의지로 제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지만 선택하기로 결심합니다.”고 기도합니다.
 
“저는 마음속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원합니다.”(주느비에브수녀 <권고와 추억>)
사랑과 신뢰에 영감을 받은 이 동의는, 나를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게 하며 자유롭게 하여, 하느님께서 나에게 일어나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모든 것에서 선을 끌어내실 수 있게 합니다.
 
6) 이탈의 노력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려면 대단히 온순하고 유연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경직되어 있거나 자신의 소유나 생각, 개념 등에 집착할 경우 성령의 충동을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탈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탈을 훈련함이란 이탈의 마음을 지니고 모든 것 앞에 초연하고 자유로우며, 내적 유보상태에 있음으로써 어떤 사물이나 습관, 인간관계, 개인적 계획이 좌절되더라도 초연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무슨 일에든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열망이 생겨 그것을 실현하다가 실패한다 해도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마치 아무것도 바란 적이 없었던 것처럼 고요한 정신을 유지해야 합니다. 참된 자유는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방된 마음일 때 하느님은 우리 영혼을 찾아오시어 그분의 크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후안 데 보니아 <내적자유>)
 
성령께 대한 온순함에 가장 큰 장애는 우리 자신의 ‘지혜’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런데 이 집착이 무의식상태에 있을 때 더욱 심각한 장애를 일으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언제나 이탈의 태도로 이를 대해야 합니다.
 
7) 침묵과 평화 속에 머물기
평화를 간직하는 마음이 성령의 충동을 알아차리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내맡김, 겸손의 실천, 하느님 자비에 대한 굳건한 신뢰는 자신의 가난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여 우리의 마음은 점점 평화로워집니다. ‘평화를 간직하는 훈련’을 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건네시는 말씀을 알아듣기가 매우 쉬울 것입니다.
 
“마음을 평화롭게 지니도록 힘쓰고 세상의 어떤 것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게 하십시오. 지상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사건이 우리를 거스른다 해도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런 동요는 이익보다 손해를 가져올 테니까요.”(십자가의 성 요한, <잠언> 173.175)
 
이는 침묵 훈련과 관계가 있습니다. 침묵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평화이며, 하느님 현존과 다른 이에게 주의를 기울임이며, 신뢰를 지닌 기다림이고, 하느님 안에서의 희망입니다. 내적 방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현존 앞에 있으며 그분과 대화를 나눕니다. 침묵은 우리 안에 사시는 하느님 현존에 매료되어 우리 내면으로 기꺼이 돌아오는 능력입니다.
 
8) 기도에 충실하게 임하기
 
하느님께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으려는 결심을 굳건히 지켜나가고, 이탈과 자녀다운 신뢰로 내맡기는 자세를 기르며, 침묵과 내재성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드럽게 간청하시는 장소인 ‘마음의 공간’을 발견하려면 기도가 필수 조건입니다.
 
침묵 가운데 드리는 개인 기도에 규칙적으로 충실하게 시간을 낼 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을 가져오는지 모릅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9)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기
 
은총의 영감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옵니다. 이런 움직임이 우리 본성에서 오는지, 악마의 소행인지 아니면 성령의 충동인지 식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권고를 실천하게 되면 우리는 성령께서 당신의 충동을 일으키시는 마음의 가장 내밀한 부분인 내면의 가장 깊고 중요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이 길러집니다. 이 내면에 대한 우리의 집중력이 분별력을 키워 줍니다.
 
즉 우리는 영혼의 다양한 움직임에 주목하기를 배움으로써 성령의 충동을 깨닫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늘 하느님을 갈망하며 내적 고요와 끊임없이 기도하는 마음을 지니고,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 안에 일어난 은총의 움직임이 묵살되거나 다른 무수한 요청과 감정의 ‘아우성’속에 사라져버리지 않고, 우리 의식 속으로 들어 올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영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선한 움직임이 우리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활동하신 열매일 수 있지만, 겉보기에 분명 선한 움직이지만 악마의 교활함이 만든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추김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부패한 본성’인 두려움, 원망, 분노, 공격성, 다른 이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주목 받고 싶은 욕구와 관능적 충동 등으로 인해 우리는 가끔 유혹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며 생활하는 태도는, 그 움직임과 원천과 효과의 다양함을 읽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마음 보살핌 덕분에 우리를 초대하는 움직임들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이 쌓임에 따라 그것이 우리를 무언가를 하도록, 또는 하지 않도록 하는 성령의 초대임을 알아차립니다. 이런 움직임들이야 말로 은총의 영감입니다. 은총의 영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좋은 까닭은 ‘나약한 우리를 도우러 오시는 성령’(로마 8,26)의 활동에 우리를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10) 영적 지도신부에게 마음 열기
우리가 영적 조언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식별은 훨씬 더 쉬워질 것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겸손한 태도요 타인에 대한 신뢰로서, 하느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명확히 보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므로, 이러한 태도는 우리의 진지함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느님을 매우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열어 보일 누군가를 보내주시도록 주님께 최대한 기도해야 하며,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고해성사가 반드시 영적 지도로 연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잦은 고해성사는 우리마음을 정화하고 영혼에 일어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빛을 받기 위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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