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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은사학교 2강의:믿음과 희망-윤민재 신부님 >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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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은사학교 2강의:믿음과 희망-윤민재 신부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실비아
작성일 15-11-11 12:56

본문

제2 강의

 

 

믿음과 희망

(내적치유, 영적치유에 대하여)

시작하는 글

찬미예수님!

내가 받은 주제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그리고 내적치유, 영적치유 기도시간을 부탁 받았습니다. 그래서 1부는 믿음과 희망 그리고 치유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2부에는 치유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신덕과 망덕에 대한 교회의 좋은 서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적인 내용들을 다루기보다는 은사 특별히 치유은사와 관계하여서 신덕과 망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희망이 영혼과 육신의 치유에 어떻게 유익한지를 저의 삶과 체험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영적 치유와 내적 치유에 대하여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는 제 신앙을 바탕으로 제가 만나는 하느님에 대하여 말씀드릴 것입니다.

1.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 7)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어두셨다는 말씀을 굳게 믿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시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시련이 와도 나를 사랑하시는 분에 힘입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어서 힘들어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그의 인생에 그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소개하고 믿음이 생기게 한다면 그 사람은 사기충천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모르는 것까지 알고 계시고,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예, “방황하지 마라.”)

1)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 37)

때때로 세상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두려움에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하느님의 뜻이 마침내 이 세상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되면, 우리는 더 많은 은총 속에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지혜를 믿기보다 세상 사람들의 말이나 과학자들, 환경론자들의 말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그들의 말씀이 성경말씀이나 되듯이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예, LA강의)

무엇이 진리인가? 하느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권능을 사람들이 믿는가? 우리가 절망에 믿음을 두면 그 믿음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에 믿음을 두면 희망대로 이루어집니다. (예, 윤리 윤리신학자의 믿음: 15년이 못되어서....)

2) 자신이 기도한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 믿는가?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그대로 일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 21-2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어느 정도 믿고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기도하고 무엇을 기도했는지 그것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고, 또 감사드리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이 청한 것에 대하여 믿어야 하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믿음은 기적을 이루는 바탕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말씀드리는 것 속삭이는 것까지 다 듣고 계십니다.(예: 10년 아기 갖지 못한 자매님, 루르드에서의 기도)

3) 믿음과 치유의 관계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의 과부의 아들같이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사람들을 살려주시거나 치유시켜주시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는 그 사람의 믿음으로 인해서 구원되었고, 치유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을 때,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 22)라고 말씀하셨고,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려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에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 28)라고 하셨고, 예리코의 소경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 42)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치유는 예수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전권을 믿고 의탁하고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4) 믿음의 행동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입니까?

믿음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머리로만 혹은 생각으로만 믿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묵상해보면 믿음에 간절하고 열정적인 행동이 따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겸손함,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의 간절함, 예리코 소경의 열정적인 외침, 자캐오의 나무 오름이 치유를 받게 합니다. 그래서 치유자는 청중들의 믿음이 간절해지도록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간절한 믿음은 주제와 맞는 찬미성가를 부를 때, “아멘!”이라고 큰 소리로 외칠 때, 마음으로나 소리를 내어 간절함을 호소할 때 드러납니다.

2. 희망에 대하여

인간은 무엇을 희망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하고 무엇을 기대하는가?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인내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 22-25)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고대해왔습니다. 그들은 성서에 정통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만 명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 받으신 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살았던 이야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자연의 주관자가 하느님이시기에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잠재우시는 능력을 통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하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던 메시아는 현세적인 메시아였습니다. 다윗처럼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하고,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주고, 경제적으로는 부를 가져다주며,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정치를 실현하는 그런 현세적인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 36)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의로움에 주리고, 자비로운 사람들이 행복하다.’(마태 5, 3-12)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현세적인 메시아를 원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직접 그들에게 오셨지만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약속대로 그들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거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살리려 노력하는 빌라도에게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 25)라고 하면서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거절하며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며 하느님 없이 살아온 그들은 2천년 가까이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 자신이 떠날 때 우리는 비참함에 처하게 됩니다.

1) 희망과 치유의 관계

하느님이 우리의 희망이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이, 현세적인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때 우리는 언제나 불안하고, 현세적인 것을 잃을 때 온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실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인 것을 하느님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이나 시련이 닥치게 되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심하면 하느님을 등집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용서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미움을 허락하고 증오를 허락하고, 원망이나 분노를 허락합니다. 또 전부를 다 잃은 것처럼 슬퍼하거나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심하면 자살도 합니다. 이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닙니다.

 

참다운 신앙은 십자가위에서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은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 34)라고 외치면서 아버지 하느님께로 부터도 버림받은 느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명하셨습니다.

 

세상사를 살면서 많은 고통과 시련이 있지만 그래도 내 머리카락 하나까지 기억하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께 희망을 둘 때 우리는 좌절하거나 악을 불러들이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악을 불러들이고, 하느님이 내 안에 머물러 계시지 않게 합니다. 그런 상황을 만들게 되면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떠나 고난을 겪게 된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하느님을 떠나고 더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내적 치유는 바로 하느님이 다시 그 사람의 주인이 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 세상이나 육신, 미움, 원망, 슬픔, 실망, 분노, 탐욕, 게으름, 두려움, 공포 등이 주인이었다면, 그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도록 도와주며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바로 치유입니다. 치유자는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가를 알아내고, 다시 하느님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되시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3. 치유: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는가?

문제에 봉착하면 고통스러워하거나 압도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종종 문제를 너무도 잘 처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문제에 압도당해 스스로 통제력을 상실하거나 문제에 의해 통제되어 버립니다. 통제력의 상실로 그들은 절망감이나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각한 분노를 터뜨리며 주위의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따라서 불안과 우울증이 자리 잡게 되고 더욱이 건전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어 더욱 문제를 크게 만들어 버립니다.(마르틴 파도바니 지음, 백승치 옮김. ‘상처입은 감정의 치유’ 28쪽)

 

우리가 문제를 기피할 때, 그것들은 머지않아 결국 우리를 압도하거나 조종하게 됩니다. 문제를 기피하는 방법은 무기력으로 가든지 우울함으로 가든지 분노나 잘못된 감정으로 가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중독 이를테면 알콜중독, 과식, 과소비, 약물중독, 게임중독, 유희, 섹스중독 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는 현실을 파악하여 아무리 이 현실이 고통스럽고 거칠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우리를 건전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문제를 더 악화시키지 않고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치유를 한다는 것은 과거의 어떤 상처나 사건으로 인해서 자신도 모르게 습득된 잘못된 습관과 현재 봉착된 문제로 인해서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질서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치유 되는 것은 자신이 그런 잘못된 습관이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질서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행동을 자기 스스로 절제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는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야 하는 것이고 또 죽을 때까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영적치유와 심리치료의 관계

많은 사람들이 심리치료와 영적치유 두 가지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데 저 역시도 그렇게 봅니다. 심리학이 인간을 이해하고 치유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며, 또한 신앙이 인간을 치유하는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면서 신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학도 필요하고 신학도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 역시 인간이지만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영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에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또한 영적인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근본인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질서를 잡을 때 우리는 바른 삶에로 나아가게 되고, 올바른 윤리관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법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동성혼인이나 낙태가 합법화 되지만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법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치유는 심리치료보다 더 깊은 차원의 치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치유자가 영성과 심리학을 잘 통합하여 치유할 때, 대단히 깊이 있으며 폭넓고, 강력한 치유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영성치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용서와 사랑 그리고 기도입니다. 사람은 이성과 감정, 육신, 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같이 치유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저는 전인적인 치유라고 배웠습니다.

2) 영적 치유

영적 치유는 무엇인가?

저는 영적 치유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하느님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이성(생각)이 하느님의 생각과 다른 경우가 많고, 때로는 감정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감정이 아닌 경우가 많고, 때로는 행동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영적 치유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무질서한 욕심으로 인해서 육체의 병이 왔다면 그 욕심을 하느님의 뜻으로 변화시켜야 하고, 생각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감정이 하느님께서 원하는 감정이 아닐 때 그 감정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러합니다. 의사가 수술을 할 때, 어떤 경우는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팔이나 다리가 썩어 들어가 생명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의사는 생명이 최우선입니다. 그러고 나서 건강을 유지하거나 증진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태 18, 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물론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최고의 가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태 16, 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육신을 가졌기에 자꾸 죄를 짓는다면 건강이 오히려 그 사람의 영혼을 해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생각을 바꿔주어 그 힘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때로는 육신은 허약하지만 누구보다도 그 불편함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영적으로 볼 때 누구보다도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치유는 그의 영혼과 육신과 정신이 하느님께 뿌리를 내려서 하느님을 향하여 있고, 하느님께 봉사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가 거룩해지길 원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 27-28)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치유에 적용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 루치아 할머니)

3) 이성의 치유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예전에 어머니들 교육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 자매님이 초등학교 3학년인 자신의 아들에 대하여 대단히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붕어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전자렌지에 넣고 돌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매님 생각에는 아들이 미쳤거나 생각이 모자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그 행동을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어머니들께 그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 아들에 대하여 호기심이 많다, 용감하다, 창의적이다, 실험정신이 강하다, 훌륭한 과학자가 될 것이다 등등 말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이 괜히 걱정을 했다며 안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는 건강한 아이이지만 그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생각이 잘못 되었을 때는 그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이것도 훌륭한 치유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바로 잡아주고,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하도록 변화시켜주는 것입니다.(예, 마귀병에 들렸던 바오로, 치매 걸리신 어머니)

4) 행동의 치유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면 건방지다고 하거나, 절제력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 어린이는 참견하면 안 된다 등등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비교적 허용 적이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 오히려 미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감정이나 행동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쑥스러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외치게 한다든지 혹은 손뼉을 치거나 크게 찬미를 부르거나 울거나 율동을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고, 치유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행동치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성령기도회는 전인적인 치유센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회 안에서는 말씀을 통해서 이성을 치유하고, 찬미와 율동을 통해서 감정과 행동을 치유하고, 기도를 통해서 영혼을 치유합니다.

 

또 요즘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너무 공부에만 집중시켜 예절교육을 소홀히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절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때로는 막내이기 때문에 응석받이로 자라난 경우도 있고, 형제가 없이 혼자 자라나서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배려와 절제를 가르치는 것이 치유입니다.

5) 감정의 치유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미움은 계속해서 남아 있고, 억울함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힘들어 집니다. 그 이유는 머리로는 즉 이성으로는 용서를 하였지만, 아직 감정적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정적으로도 용서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감정은 자신의 의지대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상처받은 그 사건이나 그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억압하여 놓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억압하면 할수록 언젠가는 기회가 오면 다시 머리를 내밀고 다시 분노를 일으키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치유를 할 때 그 상처의 뿌리까지 치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들긴 하지만 사건 그 당시로 돌아가서 그 때의 그 두려움이나, 공포, 분노, 억울함, 미움의 감정을 다시 떠올리며 그 감정이 빠져나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 그 이야기를 해도 많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건은 과거로 회상되는 잊혀 진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용서하는 것과 감정의 치유까지 가는 것은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분노

 

분노는 종종 우리의 발전을 저해시킬 수 있고, 조종하거나 불안에 싸이게 하고 불건전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잘 컨트롤하는 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 58쪽)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들처럼 분노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분노도 인간성의 또 다른 한 면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를 느끼고, 다루고, 드러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를 의식하고 편한 마음으로 표출하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화가 나있는지, 누구에게 화가 나 있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담자가 화가 나는 이야기를 말 할 때 함께 그 감정을 느껴 줄줄 알아야 합니다. “화를 내면 안 된다.”고 하거나,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면 내담자는 치유될 수 없습니다. 그 분노의 감정을 허용하면서 표출하게 할 때 내담자는 그 분노를 조절하게 되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 60쪽)

 

성서에는 하느님께서도 분노하시는 분으로 나옵니다. 예수님도 때때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그의 제자들에게 화가 나서 분노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억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 많은 경우 분노를 억압하는 것보다는 분노를 좀 더 의식하고 있지만, 분노를 차단하고 부인하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 또한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상처입은 감정의 치유’ 61-62 참조)

 

또한 분노에 대해 과잉반응을 보일 때 분노는 통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화, 격노, 분격으로 표출되며 폭력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자주 화를 내고 흥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과잉반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 62쪽)

 

만일 감추어진 분노가 표면으로 노출되어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종종 심리적, 육체적 또는 심신적 문제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대장염, 가슴 통증, 탈모, 두통, 궤양 등 신체적인 통증에 대해 말하지만 실제의 문제는 그들이 처리하지 않은 분노, 즉 그들이 은폐하고 억제하며 회피해 온 분노일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우울증은 대부분의 경우 내적으로 전환된 분노입니다.(‘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 63쪽)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어린 시절의 일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사회에서 그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분노를 아직 해결하지 않았으며 화를 내는 행동을 분명히 행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분노하고 있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왜? 느림보 같으니. 어쩌다 그렇게 늦었니? 너는 머리가 그렇게 나쁘니!” 이것은 불필요하게 상처 입히는 방법으로 표출되는 분노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화가 난다. 너는 이번 주만 세 번식이나 기다리게 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건강한 모습입니다.(‘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 67쪽)

 

분노는 폭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분노는 분노일 뿐입니다. 폭력은 통제되지 못한 분노입니다. 때때로 적절한 분노도 갈등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당한 갈등은 건강한 인간관계 속에서 불가피한 것입니다. 갈등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갈등을 겪으면서 조금씩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적절한 분노와 부적절한 분노를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며 분노를 표출하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그들은 결코 자녀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비난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어떻게 분노를 표출하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2) 용서

 

열심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여 용서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풀 수 없음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선자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가 이 사람을 용서했는데 왜 아직도 분노하고 원망하며 상한 감정으로 괴로운가.” 자문하면서 스스로 “아직도 진심으로 용서 안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잊기 위해 또 상한 감정을 치유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기는 해도 우리가 진실로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 83쪽)

 

용서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면이 있는데, 잊는다는 것이 곧 용서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거치지 않은 잊음은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과 상처를 기피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감정을 덮어버림으로써 우리 스스로 진정 용서하기를 기피해 버립니다. 잊는다는 것은 우리가 받은 상처를 받아들이고 치유하기 위해 애쓰고 마침내는 용서의 기쁨을 느끼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용서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잊음은 상한 감정을 그저 덮어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덮어둔 나쁜 감정들은 때가 되면 모종의 부정적인 형태로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 84-85쪽)

 

(3) 상실의 상처

 

20대 중반의 자매님을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어머니와 떨어지려하고, 많은 남자친구를 사귑니다. 새로운 남자친구를 계속 사귀는데 그러다 보니 삶의 질서가 무너지고 영성이 흐트러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며 깊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잠도 잘 못자고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우울증 약을 먹어도, 안되고 나중에는 조울증으로 악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찾아 왔는데, 그 자매의 일생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네 살 때 아빠가 돌아가신 큰 충격을 겪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들어보니 그 사건이 그 자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렇게 새로운 남자들을 찾아다님을 깨닫게 해주었고, 그 외로움, 그리움, 일찍 돌아가신 것에 대한 원망을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점점 밝은 분위기로 나오게 되고 맘이 편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질서도 잡혔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사별은 대단히 큰 충격이고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사람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거나 아니면 더 긍정적으로 되어서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기력해지거나, 우울증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아이를 유산한 뒤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지기까지 하는 여성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크나큰 상실을 겪고 슬퍼할 시간이 필요한 그들에게 “너무 슬퍼하지 마, 아이는 또 가지면 돼.” 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다운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슬퍼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며 따뜻하게 감사 주는 것입니다.

 

유산 뿐 아니라 낙태 후에도 슬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낙태는 시술 후 곧바로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는 단순한 의료 행위가 아닙니다. 여자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만 많은 경우 남자의 동의가 있었거나 남자의 압력으로 내려진 선택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 두 사람의 영혼을 꿰뚫는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영적 고통은 대단히 깊이 남게 됩니다. 낙태 직후에는 안도감이 들 수도 있으나 결국에는 상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부정할 수도 억제할 수도 없습니다.

파도바니 신부는 낙태의 고통을 겪은 수많은 남녀를 오랫동안 상담해 왔습니다. 이들은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 줌으로써 자신들이 저지른 낙태라는 행위를 직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서적, 영적 성장과 치유가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아이를 잃고 나서 여자 혼자만 슬픔에 빠져 있게 할 수 없다며 함께 그 과정에 참여하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애써 무시하려는 남자도 있습니다. 이런 남자들도 충분히 슬퍼하고, 치유를 구하고, 용서를 청하고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상처 입은 관계의 치유’ 153-154쪽)

 

부모가 오랫동안 앓다가 돌아가신 경우, 가족들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이별의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조금 덜 슬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이별도 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편안히 잘 떠나셨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길고 힘겨운 밤샘 간호가 드디어 끝났다는 사실에 기분이 홀가분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안도감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감정에 대해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슬픔은 슬픈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한편으로 홀가분해진 마음은 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하여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이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이 살아생전에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면, 죽어서도 그런 관계가 지속됩니다. 서로 간에 대화가 별로 없던 가족이라면 누가 죽더라도 관계는 별반 달라지지 않습니다. 가족 간 불화가 심했다면 부모의 죽음은 해소되지 않은 갈등과 분쟁을 다시 몰고 와 분노가 재연될 수도 있습니다.(‘상처 입은 관계의 치유’ 203쪽)

 

(4) 그 밖의 감정들

 

이 외에도 슬픔, 두려움, 억울함, 미움, 원망 등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많은 감정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다룰 수는 없기에 앞의 내용을 명확히 이해해서 적용하거나 혹은 참고 도서들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6) 유능한 치유자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어떻게 소경을 인도할 수 있겠는가 하시면서 자신의 눈의 들보를 들여다 볼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가족 상담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머리 보웬은 그의 정신과 수련의들이 부모에게서 받은 과거의 상처들이 치유되자 훨씬 우수한 상담자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배우자와 함께 정식 상담과정을 거친 수련의들만큼이나 그들 자신의 결혼 생활도 개선되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내 삶은 변화시키는 치유의 8단계 13) 이처럼 치유자는 남들을 치유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꾸준히 치유를 받아야 함을 말해줍니다.

 

부모의 모습이나 습관 행동이 그 자녀에게 전습된다는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알콜 중독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그렇습니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알코올 중독자인 가정에서 자란 세 자녀 중에서 두 명은 자라서 알콜 중독자와 결혼하거나, 그 자녀가 알콜 중독자가 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부모가 모두 알콜 중독자인 경우는 그 자녀들이 거의 100%에 가깝게 알콜 중독자로 자란다고 합니다.(내 삶을 변화시키는 치유의 8단계 13)

 

이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고 비슷한 모습으로 혼인생활을 해나갑니다. 그러므로 치유자 자신은 부모나 형제 친지들에게서 받은 영향들 중 긍정적인 요소는 무엇이고 부정적인 요소는 무엇인지 꾸준히 기도하고, 공부하고, 듣고 깨달아 자신이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회피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자신이 어떻게 그 문제에 개입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지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안 되는 경우는 전문가나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정이 치유되는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많이 볼수록 치유도 더 잘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상담자 자신의 많이 치유되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도 잘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담자를 바라볼 때, 그의 무질서가 어디에서 발생했는지를 알아차리고, 그 부분에 대하여 많이 들어주어야 합니다. 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할 때, 먼저 진찰을 하고 그의 아픈 부위가 어디인지 약물을 사용할 것인지, 수술을 할 것인지, 재활치료를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처럼, 유능한 치유자는 그의 이성이 문제인지, 감정이 문제인지, 행동이 문제인지, 하느님 관이 문제인지를 깨달아 적절히 들어주면서 그 문제를 치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정확히 또 빠르게 치유할 수 있습니다.

 

치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1서 12장에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4장에서 다시 신령한 언어와 예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혹자는 사랑에 대한 말씀 중에서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은사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속되다고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을 선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모든 은사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은사를 사용할 때 자기 자신의 영광이나 교만으로 사용하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14장에서 다시 특히 예언할 수 있는 은사를 열심히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예, 신 내림 받겠다는 딸)

맺는 글

성령쇄신 봉사회에서 봉사한다는 것은 은총 속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체험을 하고, 성서 말씀이 나의 삶 안에서 이루어짐을 체험합니다. 특히 우리는 많은 치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성령세미나를 할 때마다, 또 이런 특별한 교육이나 피정을 통해서 자신이 치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저는 성직자 수도자를 위한 성령묵상회에 참여할 때마다 참 많은 은총을 받습니다. 저는 봉사한다기보다 나에게 많은 은총을 내려주시는 시간으로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저는 그런 기회에 많은 은총을 받습니다. 저는 치유기도회를 하면서도 저를 가장 많이 치유시켜달라고 기도합니다. 제가 아는 상처와 알지 못하는 상처까지도 치유시켜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기도회 때마다 많은 치유 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치유 받아야 하는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치유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모두 치유를 받고 이 세상을 마칠 때 우리는 연옥의 정화시간을 갖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이 여러분 모두에게 복된 치유의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또 여러분들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되길 기도합니다. 부족한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아멘.

참고도서

1. ‘내 삶을 변하시키는 치유의 8단계’ 마태오 린 외 2인 저, 김종오 역, 생활성서사, 2003.

2. ‘상처 입은 관계의 치유’ 마르틴 파도바니 저, 권은정 역, 분도출판사, 2011.

3. ‘상처 입은 감정의 치유’ 마르틴 파도바니 저, 백승치 역, 분도출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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