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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은사학교 -제6강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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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로사
작성일 14-10-0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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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은사학교
2014.09.15-19 대전 정하상교육관
 
제6강의 성령의 기름부으심 (성령 안에 잠김)
 
1. 오늘날의 도전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는 코린토 1서 12장 7-10절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교회다. 사실 전 세계 모든 교회 성장의 70%가 은사를 활용하는 교회이거나 오순절복음 교회들이다.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신자의 3분의 1은 자신들을 은사적이거나, 또는 이름으로는 아니지만 가치 와 접근 방법상 오순절 교회라고 여긴다. <데이핏 배렛(David Barret)과 토드 엠 쟌슨(Todd M Johnson)의 글로벌 미션에 관한 연간 통계표에 나오는 널리 인정받는 통계치를 보라.>
이는 위축되는 그룹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교회 역사상 성령 쇄신이라는 가장 큰 은총의 특권적인 시대에 속해 있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오늘 “주님이 누구시냐?”고 묻고 있다. 많은 이들이 뉴 에이지와 밀교로 향하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을 해방시키고 세상에 “주님께서 참으로 하느님”(1열왕 18,19)이심을 제시하라고, 영적인 대결을 요구받고 있는 역사의 순간들이 오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에서 본다. 파라오의 마술사와 대결하는 모세의 직책,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는 엘리야의 직책, 법에 묶인 종교와 율법주의와 이교도 세상과 대결하시는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사목, 많은 위대한 성인과 거룩한 사람들의 사목.
 
오늘날 우리는 사탄숭배주의의 봉기와 폭발적인 밀교, 뉴 에이지,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 율법주의적이거나 무법천지인 종교의 확산과 물질주의의 팽창, 세속적인 의안과 종교의 형태만 있지 힘이 없는 그리스도교라는 도전을 받고 있다. ‘성령은사쇄신은 교회를 위한 하나의 기회’(바오로 6세)다. 그러나 기회란 놓칠 수도 있다. 지금은 일어서서 성령의 능력으로 부르심 받은 대로의 존재가 되어야 할 때다. 하느님께서 우리 시대에 당신의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이 시대에 커지고 있는 악을 대결하여 하늘나라를 확장시킬 은총을 쏟아 부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의 자리에 서서, 할 수 있는 대로 큰 사랑과 겸손으로 온갖 거짓 예언자들, 마술사, 마법사들 같은 이들보다 더 큰 영적 권한을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과 모든 이의 주님이심을 선포하고 보여주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하고 계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하느님처럼 위대한 신이 아무 데도 없음”(시편 77,14)을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데 항구해야 한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주실 수 있는 분,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에페 3,20)
 
2. 성령의 기름부음(도유)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먼저 기름부음의 어원적 의미를 통해서 살펴봄이 좋을 것 같다. 기름부음은 어원적으로 그리스말로 Chrio이며, 이는 기름을 바르다, 문지르다의 뜻으로서 어떤 일이나 종교적 봉사를 위해 성별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을 성경의 관점에서 기름부으심으로 이해하면, 인간의 육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의 힘에 의해 육신이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코린 4,7). 성경에서는 ‘기름을 붓다, 기름부음을 받다’는 것이 “선택되다”, 즉 직무를 위해 분리시키다, 정화(성결, 거룩하게)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탈출 19,10; 여호 3,5). 이것은 또한 그분이 부르셔서 맡겨주신 직무 혹은 지위를 위해 권한을 부여 받다는 것도 포함하며, 이를 통해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심을 의미한다. 곧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책임을 부여 받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기름부음의 유래는 고대 근동지방의 목동들이 양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해충들이 기름 때문에 미끄러져 양의 귀 쪽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해충들이 양털에 들어가 머리부근까지 올라가게 되면, 양의 귀에 구멍을 파서 결국 양을 죽게 하였으므로 생긴 방책이다. 이것이 축복, 보호 그리고 권한부여의 상징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기름부음에는 구약에 따르면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사제를 기름부음이요(레위 8,12), 두 번째는 왕을 기름부음이며(1사무 16,13), 세 번째는 예언자를 기름부음이다(1열왕 19,16).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이스라엘은 메시아라 칭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사제이며 왕이시고 예언자이셨으므로 기름부음 받으신 분이신 것이다(사도 10,38).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이 단지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처럼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의미하며, 이사 10,27에서처럼 어깨의 짐이 벗겨지고 목에서 멍에가 사라지게 한 기름부으심이 우리에게도 허용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3. 성령의 기름부음 받음(도유)의 현상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강림일에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기름부음(도유)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지금은 아침 아홉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
그날에 나의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사도 2,14-18)
 
그때처럼 오늘날도 성령의 기름부음(도유)이란 주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이며, 우리 영의 내면에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말하고 싶은 충동이며 움직임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도유)은 손가락이 떨리거나,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지나가고, 혹은 갑자기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등 여러 모양으로 올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도유는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평화스러운 느낌,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느낌, 손에 전율이 생기는 것같이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올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주님께서 “지금 정신을 차려라. 내가 말을 하려고 한다. 이 말을 들어라.”하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때때로 성령의 기름부음(도유)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열쇠입니다. 다음은 사람들이 생전 처음으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후에 나눈 성령의 기름부음(도유)의 실례들입니다.
 
“제 팔에 소름이 돋았어요.”
“심장에 뜨거운 기운이 지나갔어요.”
“온 몸 전체에 따스함이 번졌습니다.”
“평화와 확신 같았어요.”
“저는 단지 저한테서 큰 사랑이 흘러나오고, 저에게 오고 있는 말씀을 나누어야 한다고 느꼈지요. ‘내가 너에게 빛을 주었다. 이 빛을 받아서 평화와 사랑과 기쁨 중에 세상에 전하여라.’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저는 가슴 부근에서부터 머리와 두 귀에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고,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습니다.”
“온몸이 불처럼 뜨거워지는 걸 느꼈습니다. 아직도 느끼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너라. 내가 팔을 활짝 벌리고 있다.’ 그리고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울고 싶다는 느낌이에요.”
“전 정말이지 몸이 나른해 옵니다. 심장이 아직도 달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 딸아, 내 백성을 내게 되돌려 다오.’”
“저는 몸이 꿈틀거리는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온몸이 뜨거워졌고 심장이 마구 뛰고 있었습니다. 전에도 예언 말씀을 전한 적이 있지만 오늘 말씀은 특히 강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저를 통해 쏟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자녀들이다. 나는 너희를 극진히 사랑한다.’ 그 말씀들이 다시 제게로 되돌아왔습니다. 보통 때처럼 저는 확신이 없었지만 그 말씀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너무 빨리 뛰기 때문에 그냥 그 말씀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피부 전체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저는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얀 빛줄기가 제 머리를 덮고 저를 에워싸는 것을 느꼈구요. 엄청난 기쁨을 느꼈고, 다음의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리고는 저는 그 말씀이 주님께로부터 온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찬미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주님이 저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주님의 거룩한 옷에 대한 아름다운 영상을 보았습니다.”
“예언의 은사에 관한 가르침에 참석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내내 평화를 느꼈는데, 그것은 거의 그 자체가 말없는 예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날은 네가 예언하도록 내가 선택한 날이다.’”
“제 팔과 다리가 마치 납덩이처럼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힘이 다 빠져서 발을 질질 끌면서 여기(무대) 올라왔습니다.”
“저는 갈바리아에 계시는 예수님의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계속 ‘나는 너희를 위해 죽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앞에 있던 어떤 부인이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이야,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위해 죽었다.’ 그녀는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어야 했던 말씀을 저에게 말해주면서 말을 끝낸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모두에게 팔을 두르고 계셨으며, 우리는 주님과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어서, 이제 주님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아버지를 뵈옵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겁니다. 큰 빛이 비치고 있었는데, 당신 팔로 우리를 감싸셔서 빛 속으로 데려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뒤에서 예언의 은사를 청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기도하는 동안 엘리야, 에즈라, 바룩, 예레미야 등 많은 예언자들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둥그렇게 서서 기도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우리 주위에 둘러서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를 위해 중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훌륭한 분들 손에 맡겨진 셈이었죠.”
 
치유의 은사를 위한 성령의 기름부음(도유)도 대체로 비슷합니다. 기도를 해주는 이나 받는 이의 손과 가슴이나 등이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발등이 뜨거워지는 이들은 가르침의 은사를 받아 여기 저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러 다녀야 할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은총 충만한 대화중에 장미 향기나 자스민 향기를 진하게 맡을 수도 있고, 문이나 창문을 열어 놓지 않았는데도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뺨에 훅 불어오기도 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찌르르 지나가기도 합니다. (로버트 드그란디스-예은의 은혜)
“메주고리예 들판을 걷고 있었을 때, 또 그곳 성모님 발현이 이루어지는 소성당으로 들어갈 적마다, 장미 향기가 진하게 풍겨왔지만 아무 데도 장미꽃은 피어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 프란치스코 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다가 심령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발목부터 무릎, 허리, 가슴, 어깨로 뜨겁고도 시원한 기운이 밀려 올라왔고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진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성령의 기름부으심(도유), 즉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활동하고 계신다는 확실한 감각적 표징들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며 우리가 바라거나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아빠아버지 하느님(에페 3,20)과 주 예수 그리스도님, 사랑의 성령님, 영원토록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알렐루야!”(백 잼마 마리수녀 제공)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음과 기름부음 받음의 차이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셨을 때(루카 4,18), 예수님은 공생활과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시작하신 반면에 성령의 인도받으셨을 때는(마르 1,12; 마태 4,1) 유혹을 받으시고 견디어 내시는 과정을 겪으셨다. 기름부음과 영이 내리심(이사 61,1)의 기능을 본다면 좀 더 쉽게 성령의 기름부음의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루카복음 4장에서 인용하신 이사야서의 기름부음의 기능은 먼저, 가난한 이에게 기쁜소식 전함이었고 잡혀간 이에게 해방선포이었으며,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를 해방시켜주며 주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하느님의 기름부음의 이유가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증거하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성령의 기름부음 받음의 유지와 성장
 
그렇다면 기름부음의 핵심은 무엇일까? 기름부음의 핵심은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유지하는 것일 것이다. 다른 말로 입성이 아니라 수성의 어려움이랄까? 그러나 기름부음의 유지와 성장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과연 어떻게 기름부음을 받을 것인가를 먼저 간단히 짚어 보겠다. 기름 부음을 받으려면 사랑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이 동기였기 때문이다(마태 9,36.) 예를 들면, 치유의 기름부으심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과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만과 비판, 단죄와 편견, 형식주의와 판단은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양립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에 사랑이 없는 이에게 하느님은 당신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지 않는다. 물론 당신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통해서 사랑과 연민의 정을 갖게 하는 특별한 경우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기름부으심을 어떻게 수성할 것인가? 이것을 세 가지 관점으로 축약해 본다면, 첫째로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그분을 사랑하는 데 더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톨릭 신자는 성사생활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을 닦아야 한다. 성령을 더 알아가고 그분을 기꺼이 영접하고 그분의 생명수를 매일 그리고 더 깊게 마셔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협력자, 선생님, 위로자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 나아가고, 그분이 매일 늘 새롭게 오시기를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특별히 심령의 언어는 필수적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분 안에 늘 머물려면 매일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분께서 당신의 완전한 빛으로 우리를 비추시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태도를 온전히 드러내게 허락해야 한다. 교만한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고, 교만하지도 않지만 겸손하지 않은 사람도 이렇게 할 수 없다. 오로지 주님과 사람들 앞에 겸손하고자하고 겸손한 사람들만이 성령께서 먼저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기를 허락할 수 있다. 이렇게 성령께 돌아서서 그 은총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더욱 더 변화되어야만 그분의 기름부으심을 수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기적 마음, 태도, 행동에서 죽어야 한다. 이는 곧 자신의 기름부음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름부으심을 자신 안에 가두면 우리는 수성할 수 없다. 우리가 기름부으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계속해서 나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내 관심, 내 능력, 내 명예 등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성령의 본질과도 병행되는 것이다. 그분의 본질, 즉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사랑을 촉진시키시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게 하며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타인을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점검해야 한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부담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사실 두려움의 영이 많은 신자들을 묶어 놓고 그들의 충만하게 살 수 있는 삶을 방해하고 있다. 주님은 세례를 통해서 신자들을 삼중의 의무를 위해 기름부으셨지만, 자신이 과연 그런 삼중의무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 직무를 포기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기름부으심을) 새롭게 체험하지만 곧, 이게 얼마나 오래갈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여 자신을 의심과 불신 그리고 두려움에 집어넣으려 하는데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소심함과 두려움의 영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2티모 1,7). 그리고 우선순위를 정착시켜야 한다.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우리의 삶을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분이 되셔야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순명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순명은 우리 기름병에 기름을 말려버리거나 흘려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아 이적과 기적으로 불리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지시대로 아픈 이를 치유하기보다 두려워하면서 믿음을 잃고 결국은 불순명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이것을 반복함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께서 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어, 마침내 그들에게 내려졌던 기름부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건드리셔서 그들의 삶이 기쁨과 평화 그리고 표징으로 가득 차,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흘러넘쳐 그들이 기름부음을 받지만, 자신들의 삶의 죄는 계속 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분의 기름부으심을 계속 바라지만 자신들의 죄를 버리는 것을 기꺼이 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을 슬프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죄와 기름부음은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름부음이 죄를 없애버리든가 죄가 기름부음을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기도의 시간에 대해서는 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짚고 넘어가는 것은, 현대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봉사하는 데 참여하고, 봉사하고 싶어해서 좋은 현상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과 단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쉽게 간과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성장하는 열 가지 열쇠(다미안 스테인)>
 
1. 절대적인 확신 : 우리는 이런 은사들이 우리와 교회의 건강과 성장을 위해 주어졌으며, 또 필수적이라는 계시(에페 1,17 이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이 은사들은 그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자동차의 햇볕가리개나 서라운드 음향처럼 선택의 여지가 있는 여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은사들은 정상적인 크리스천 생활에 본질적인 부분이며 교회의 선교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마르코 16,17-18).
 
2. 희망 : 하느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베풀어주셔서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해주시리라는 희망 없이는, 은사들을 갈망하고 또 은사들을 위해 믿음을 실천하지 못할 것이다(히브리 11,1). 우리 경험에 의하면 성 바오로가 격려하는 그런 종류의 갈망을 발전시키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 ‘영의 은사들을 간절히 구하십시오.(I코린 14,1)’ 희망은 우리 갈망의 초석이다. 희망과 갈망을 생생하게 간직하려면 규칙적으로 감사를 실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백성이 주님께로부터 멀어졌던 것은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행하신 위대한 업적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는 데 실패했을 때라는 것을 말해준다(시편 106,7.13.21). 우리는 희망 없이는 인내할 수 없고 오직 인내를 통해서만 열매를 맺는다(루카 8,11).
 
3. 믿음 : 성령의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서 날마다 믿음을 크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믿음이 치유의 기적과 구마에 주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안다(마태 오 9,2; 마르코 9,18). 바오로는 “믿음의 정도에 따라 예언하라”고 말해준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믿음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는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가 작은 일에 충실함을 보시고 더 큰 믿음의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4. 기도와 단식 : 성령의 은사 사용에 열매를 맺으며 성장하기 위해서는 깊은 기도 생활이 필수적이다. 이는 실제로 날마다 상당한 시간을 기도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려고”(1테살 5,17) 애쓰는 것을 뜻한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받지 못하는 것은 청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야고보 4,3). 성령의 은사를 위해서 날마다 기도하면 우리 삶속에 은사를 활용할 때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더 크게 하고 도유를 받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단식 하는 것이 은사의 효과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5. 순결함 :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순결한 삶을 살라고 부르신다. 성 바오로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라”(2코린 7,1)고 우리를 격려하며, 티모테오 2서 2장 20-21절에서 우리가 스스로 깨끗해져야 귀하고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집에서 쓸모 있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 순결함의 요구는 우리 삶의 온갖 영역에 해당된다. 우리가 타인과 자신을 대하고 바라보는 태도,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는 것,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어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인터넷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이다.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이런 점에서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6. 가족 : 많은 이들이 “하느님과 그분의 일”이 먼저고 다음에 다른 일들이라고 말했다. 나 같으면 다르게 표현하길 좋아한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 두 번째는 가족사랑, 셋째는 다른 이들에게 행하는 하느님의 사목. 예수님께서도 부모에게 드렸어야 하는 것을 하느님께 드림으로써 부모를 공경하는 법을 어떻게 깨뜨리는지에 관해서 말씀하신다(마태오 15,3 이하). 이는 교회 내 많은 이들 사이에 공통된 실수이며, 교회와 기도모임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주의를 쏟고 배우자와 자녀들에게는 거의 시간을 내지 않는 이들 안에서 발견 되는 매우 흔한 실수다. 가족이 먼저인 이유는 가족이 우리의 첫 번째 선교현장이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삶속에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첫 번째 사람들인 까닭이다. 물론 이는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파견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선권의 질서를 잡는 문제인 까닭이다. 나의 아내와 아이들은 내 마음속에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다른 사목, 하느님의 일보다 우선하는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나의 일상의 시간이 내 기쁨이고 나에게 거룩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가족이 사목에 관해 응원군이 되고 가정 너머 사목에 대해 열정적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7. 겸손 : G. K 체스터튼은 “아무도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 또는 악할 수 있을지 알기까지는 참으로 쓸모가 없다.”고 썼다. 가톨릭교회의 교리서에 보면 ‘겸손이 기도의 기초’라고 말해준다(2559항). 성령의 은사 실행이,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고 우리 자신이나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면, 겸손에 성장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은사가 위대하면 할수록 더 큰 겸손이 요구된다. 친절하게 우리에게 우리의 죄와 약점과 맹목적인 부분을 알려주는 사랑하는 친구 몇 명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은총이다(잠언 18,12). 찬양은 겸손의 본질적인 요소다. 당신의 겸손을 되돌아보신 죄 없으신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피조물 중 가장 겸손하신 분이셨다. 그분은 자신의 비천한 신분을 인정하시고 겸손하게 머무르셨고 하느님을 찬양하셨다(루카 1,46-55).
 
8. 이탈, 초연함 : 이는 오늘날 특히 서구에서 인기 없는 덕행이지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덕이다. 물론 이는 교리서가 ‘부로부터 초연하다는 개념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의무’(2544항)라고 분명히 하는 바와 같이, 돈과 소유로부터 초연함을 뜻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과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은 온갖 종류의 탐욕을 주의해야 하는 까닭이다. 사람의 삶이란 소유의 풍요로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루카 12,15). 신약성경을 보면 능력을 받은 사목자는 돈과 소유에 대한 집착을 잘 처리하곤 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필리피 4,11)라고 말하는 바오로가 가진 똑같은 자유를 누리기를 바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이탈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삶에서도 이탈의 삶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많은 이들이 영적 위로와 위안에 집착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서 치우셔야 한다. 좋은 아버지는 아이에게 때때로 단 것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단 것을 너무 많이 주면, 버릇이 없어지고 이가 썩는다. 그 결과 견실한 음식을 먹으려는 욕구와 능력이 상실된다.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단것만 먹어서는 천국에 갈수 없다. 하느님께서 때때로 기도 중에 우리를 위로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위로가 우리 우상이 되거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9. 공동체 : 모든 은사는 교회 공동체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교리서 951항). 그러나 광범위한 교회 공동체 가족 내에서 우리 모두는 은사를 배양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실수를 하고 배울 수 있는 안전한 곳, 기도와 사랑과 신의의 지역적 맥락이 필요하다. 그것은 기도 그룹, 쎌, 혹은 다양한 종류의 공동체다. 역사를 살펴보면 공동체라는 맥락이 없이는 은사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건전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가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은사를 식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불러내는 것은 공동체인 것이다(사도 13,1-3).
 
10. 사랑 : ‘사랑을 구하고 성령의 은사를 간절히 구하십시오.’(1코린 14,1). 우리는 사랑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를 구한다. 우리가 가장 특별한 은사를 받을 수 있지만, 바오로가 확인시켜 주듯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1코린 13,1-3). 사랑이 없으면 성령의 은사는 도덕적, 영적, 사목적 매장지가 될 뿐이다. 성경 말씀대로 성령의 은사를 간절히 구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나, 속지 말아야 할 것은 은사 자체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랑만이 기쁨을 가져온다. 기적의 은사를 받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랑 없이는 즉시 그저 통계로 그칠 것이며, 감히 말하건대 지루한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을 확신시켜 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마르코 6,34)이 드셔서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셨다. 사랑을 목표로 삼으면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가 교회와 세상과 우리 자신에게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명할 때 증가된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현대 사회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허하고 껍데기만 있는 인본주의, 이성주의 그리고 그릇된 신심은 사람들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으며 그들의 어두움을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수도자들과의 만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 교회가 번영되었으나 또한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목자들은, 기업사회에서 비롯된 능률적인 운영, 기획, 조직의 모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준보다 우선하여 취하려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라는 현실에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준비하고 기름부으심을 받아 성장하여, 절망 속에 죽어가는 사회에 그분의 삶과 빛과 치유의 능력을 나누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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