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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 구마 심포지엄 5 - 사탄의 활동 >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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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 구마 심포지엄 5 - 사탄의 활동

페이지 정보

작성자 로사
작성일 14-10-02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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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 구마 심포지엄 5
 
심포지엄 5
(사탄의 활동에 대한 연속 강의)
  • 하느님을 대적한 반항,  하느님의 뜻과 영을 거부, 반대한 활동
  • 우리가 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사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우리 영혼을 채우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누군가 회의적이고 슬픔 속에 자신을 내팽개치고 살기 시작하면 사탄의 지배에 종속되는 한 방법이 된다. 하느님의 영은 사랑이시고 기쁨이며 평화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이 있는 곳에 기쁨과 사랑, 평화가 있다. 하느님의 영이 부재하는 곳에는 하느님도 계시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자주 이런 식으로 우리를 속이며 사탄이 우리에게 접근하며 유혹하는 흔한 방법이 이것으로써 십자가의 성 요한께서도 악을 행하는 게 아니라 위선적인 선을 행하는 게 문제라고까지 가르치셨다.  
무질서를 만드는 사탄
어느 도시에서 어느 날, 어느 여자가 주일 내내 한 성당에서 살다시피 지내고 있었다. 그날 봉헌된 4대의 미사에 모두 참여하면서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면  훨씬 더 거룩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집에 혼자 남은 남편은 밥도 해주지 않는다면서 성당에 있는 부인을 있는 대로 욕을 하고 있었다. 집에 붙어있는 날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거룩해진다. 거룩한 주일미사에 참여하라고 명령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는  가정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이시다.  기도할 시간이 있고 음식을 장만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를 기억해 보자. 마르타는 부지런히 음식 장만을 하고 있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그런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예수님께서 두 자매의 집을 찾아가신 것은 거하게 음식이나 먹자고 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과 함께 당신이 구상하고 계신 구원계획 들려주고, 이를 함께 나누고자 함이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느 설교가가 설교를 마치면서 이런 결론을 지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을 방문하신 뒤 드디어 마르타는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마리아는 요리하는 법을 배웠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거꾸로 된 가치체계를 가르치면서 무질서를 조장하고, 하느님과 인생에서의 진정한 가치를 은근슬쩍 소홀히 하도록 유도한다. 가정과 결혼생활, 영신생활 등을 방해하면서 부차적인 것들이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들자면 허영과 명품 중독이나 호화로운 생활, 의도된 쾌락 등등이라고 할 수 있다.
 
위선적인 선으로 속임수를 쓰는 사탄
어느 날 내가 맡고 있는 본당의 한 자매가 투덜대며 하는 말이 남편이 기도회에 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물었다. “ 점심시간에 들에서 돌아오는 남편이 성경 읽고 있는 자매의 모습을 봅니까? 아니면 남편을 위해 점심을 준비하는 모습을 봅니까?” 성경을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남편이 보았으면 싶어서 성경을 읽는 모습으로 맞아들인다고 했다. 허기진 남편은 요리하는 아내를 기다리기 마련이지 성경을 읽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었다. 사탄인 이런 식으로 무질서를 조장한다.
성령의 선물은 하느님의 지혜로써 하느님의 범대로 우리 생활에 질서를 매기도록 인도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또한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삶 속에서 선택하고 정리하도록 이끌어 준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가정이 하느님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그 가정 안에 첫 자리에 계시지 못하고 가족 구성원 각자의 생각대로, 부부가 첫 자리에 있고 인간적인 감정의 질서가 우선인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는 수백 만 명이 기아로 허덕이며 목숨을 잃어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집 인테리어를 위해서 지나치게 돈을 허비한다. 시민들의 공공 건강과 교육은 소홀히 한 채 몇몇 사람들이 선호하는 정책들만을 시행하면서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시민의식을 변형시키기도 한다.  
 
 죄책감을 건드리고 유혹하는 사탄
묵시록에서 사탄을 우리형제들을 무고하던 자, 밤낮으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 형제들을 무고하던 자(묵시. 12,10)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많은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이면서도 유죄에 희생양이 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유죄상태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은 가정과 사회에서 사랑의 친교를 위해 성령의 기쁨과 자유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힘의 활동을 실현해 내지 못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내면
안에서 유죄상태라고 여긴다면 그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기도회를 찾아오지만 단 한 번도 성령께 자신을 개방하지 못합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대한 영성가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미 고해했던 어떤 과거의 죄의식이 밀려올 때,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참회와 겸손, 주님을 향한 감사, 신뢰,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함 등이 오면서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양분을 얻을 수 있도록 움직이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죄의식, 수치심, 두려움, 실망감, 심지어 극심한 좌절감까지 동반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분별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으로 부터의  해방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무도 단죄하지 않았으며 변호해 주십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받는 일이 없습니다. (로마 8,1)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로마8,33-34 참조).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 성인은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를 이루셨고 사람들의 죄를 묻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2코린토 5,19참조). 죄로부터의 해방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첫 번째 열매입니다. 바오로 성인 갈라티아 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가 죄를 조장하시는 분이란 말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갈라2,17).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지 단죄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모두는 변호가 필요하다
우리 공동체에서는 개신교론에 빠질 위험 때문에 정당화 혹은 변호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어도 과오를 범할 수도 있지만 성령께서는 겸손의 영감을 불러 일으키시고, 진심 어린 통회와 성부의 사랑에 기쁘게 의탁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정당화에 대한 선포는 우리 사목과 설교영역에서 소홀히 다루는 안되는 분야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의 핵심으로 두셨던 요소들은 바오로 서간 곳곳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영성 생활의 스승들은 자신들의 영적 양식의 기초로 삼기도 한 부분입니다. 
사탄으로부터의 첫 번째 해방의 힘은 죄책감으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어느 날 아침 성녀 파우스티나S. Faustina Kowalsk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성체를 영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져 성체를 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너의 그 부족한 모습이 내 자비에 더 큰 상처를 입혔다.” 고 하셨습니다. 한  아들이 원상복귀 시켜 놓을 수 없는 어떤 조그마한 잘못을 저지르고는 도저히 용기가 없어 부모에게 이를 말하지 않고 무서워한다면 과연 부모 입장에서는 어떤 것이 더욱 부모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이 되겠습니까? 그 저지른 작은 잘못 보다 부모를 믿지 못하는 자식의 불신이 아닐까요?  
우리 모든 죄책감으로부터 치유되어야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은 이런 죄책감이라는 도구로 우리를 굴복시킵니다. 낙태를 자행했던 사람들이 느끼는 죄책감에 관해 이미 언급했습니다. 성령쇄신 기도회의 세미나가 진행되던 중이었는데 네 명의 장정이 붙들고 있는 약 스무 살 초반의 자매를 제게 데리고 왔습니다.  괴성을 질러대고 계속 발길질과 주먹질을 하고 있고 그 뒤에서 한 사제가 연신 축복기도를 하며 따라오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매와 대화를 나누면서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부정적인 의미의 대답만 쏟아냈습니다. 저는 그 자매가 제 딸이라도 된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잡으며 제 어깨에 기대게 했습니다. 그 때 “ 무슨 일이 일어났다.” 고 했습니다. 그 자매가 6살 되었을 때, 사촌이 동성애적인 행위를 했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나 사촌을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책감이라는 중압감 알래 짓눌려 살았던 것입니다. 70살 아니 그 이상이 된 여성들이 처음으로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그들이 평생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면서 느낀 그 죄책감과 중압감에 얼마나 짓눌렸을지 모릅니다. 이런 현실 앞에 크게 눈을 뜰 필요가 있습니다.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누구든지 용서와 해방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군가를 단 한번도 단죄하시거나 처벌하지 않으셨고, 하느님의 용서인 당신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태 17,5) 즉, 그분께 순명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도록 맡기라는 뜻입니다. 이런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 선행되지 않으면 성령의 활동을 방해하는 우리가 되고, 성령세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에 운명 지워졌기 때문에 모두는 이 세상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인간은 영원함과 천국의 영광에 대한 의미를 잃었습니다. 하느님을 마주보고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을 현재 우리는 볼 수 없고, 그에 대한 의식이 없지만 죽음과 주변 환경과의 단절 등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한 밤중 아무것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죽는 악몽을 꾸고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주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 제가 이 과정을 넘어서야 한다면 당신께 저를 의탁드립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이끌어 주소서. 당신께 의탁합니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이런 악몽을 꾸지 않았습니다.  거룩하게 사셨던 아버지께서 임종하실 때,  저는 하루 종일 아버지 침상 곁에 있으면서 이런 기도를 반복해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제 곁에 있도록 배려해주신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이제 아버지를 모셔 가기 위해 오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임종하셨을 때, 눈물을 흘렸지만 기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장례미사를 봉헌 하던 날  강론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경험했고, 제 인생에서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대단히 강력한 성령의 내려오심을 경험했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면 전 늘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아이구, 주님, 가능하면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 서간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다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히브리 2, 14-15). 죽음에 대한 공포는 성령께 개방하지 못하도록 막고 기뻐하고 사랑의 자유 속에서 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탄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장례
교회는  교회 자녀들의 생명을 성부께 봉헌하는 장례미사를 봉헌할 때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 죽음과 부활 속에 잠기게 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위해 제공된 예수님의 모든 사랑을 전합니다. 그들을 창조해 주시고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알렐루야를 노래하며 그들에 대해 주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영원한 생명 축제로 들어간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장례식은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대단한 복음화의 기회입니다. 장례미사가 봉헌될 때 많은 이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고 운명을 받아드리며 마음의 평화를 느낍니다. 
모든 사람이 영원한 삶에 대한 직관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탄의 심한 방해를 받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그 근본에는 바로 이런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즉, 할아버지의 죽음, 부모 중 한 사람의 죽음, 형제나 자매의 죽음 혹은 친구 등의 죽임입니다. 이로써 그들 안에는 절망이 잠재하고 있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지 못한 것에 연유합니다. 이것은 인생의 한 영역으로써 교회가 가장 먼저 하느님의 말씀 선포와 함께 복음화 해야 할 영역입니다.
23살 된 딸을 잃은 한 어머니가 죽은 딸과 접촉하기 위해 무속의 힘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죽은 딸의 목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녹음기를 켰습니다. 그 어머니를 만났을 때 죽은 딸에게 해를 미치길 원하는지, 편안히 해주길 바라는지 물었습니다. “당신 딸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짓은 딸을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런 행위로 인해 딸의 영혼이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꽁꽁 얽어 매는 것이고 당신이 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지 못하게 자매님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딸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성심께 맡기고 성모님의 손에 맡겨서 대신 어머니가 되어 달라 청하십시오.“  조금씩 인정하는 듯 하더니 결국 딸의 영혼을 주님의 손에 의탁하게 되었고, 이런 무당을 찾아 다니는 일을 그만두면서 그 자매도 점차적으로 평화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부정적이고 심각한 관계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죽은 영혼을 주님의 손에 의탁하도록 가르쳐야만 합니다. 물론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의 고통이 있지만 주님께 드리는 의탁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장례의식을 통해 가르치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장례예식에 참여하는 친척들도 죽은 이의 영혼을 주님이신 예수님의 손에 맡기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주신 사랑의 불 속에 그 영혼을 봉헌해야 합니다. 또한 죽은 이의 영혼이 자신의 죄들과 나약함이 정화되어서 사랑 속에서 완전함에 도달하여 천국으로 인도되도록 해야 합니다.
 
죽은 이들에 대한 구원의 희망
교회 교리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알지 못하고 죽은 이들은   사후에도 영혼의 구원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네딕또 16세 교황께서는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에서 연옥에 대해서는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언급하십니다. “최근 일부 신학자들은 태워 버리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는 그 불이 바로 판관이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만남은 최종적인 심판 행위입니다. 그분 눈길 앞에서 모든 거짓은 녹아 버립니다. 그분과 이러한 만남은 우리를 태우고 변화시키고 자유롭게 함으로써 참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게 합니다. (Spe Salvi N° 47). 교황께서는 희망 안에서 희망을 지닐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하시면서 신앙을 모르고 죽은 이들을 위해서도 이런 관점으로 정리를 하십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이 믿음 모르고 죽은 가족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관례가 있었는데 이는 부활 관점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 코린토 15,29참조).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죽음이나 가족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상처를 입습니다.  예를 들어 연옥이 임시적인 장소일지라도 벌받는 장소로 보고 있으며, 지옥을 영원한 벌을 받는 장소로써 거의 대부분이 그곳으로 간다고 본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아우구스티노의 교리에 의해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세례성사 없이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 창조시작부터 현재까지 세례를 받은 사람이 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 말에 근거한다면 이 인류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여러분이 희망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이라는 교황 베네딕또 16세의 회칙 41항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교황께서는 죽음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 심판과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탄이 우리를 사슬로 묶어두는 방법들 중의 하나는 신앙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일부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마로부터 해방이 관심거리라면 위의 사실은 부마로부터의 해방보다도 훨씬 더 큰 모든 사람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정의를 실행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 법의 적용: 법의 잣대로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비추어 보는 것으로써 규범을 지킨 이는 인정해주고 보상해주며, 잘못했을 때 단죄하고 처벌받는다. 이런 방법은 사람이 법의  대상으로만 간주되는 것이지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며, 사람을 위한 법이 아니라 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구조다.  예수님은 그 반대로 가르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 (마르 3,27).
2 – 은사활용을 하면서(아버지, 스승, 친구):  이 심포엄에 참여하신 부모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떤 식으로 잘잘못을 따지십니까? 그 중 누군가가 다른 자식보다 더 약하다면 그를 야단치십니까 아니면 더 사랑합니까?  혹은 다른 자식보다 공부가 뒤처진다면 야단을 치십니까, 도와주십니까? 부모 여러분, 자식들을 야단칠 때 정당하고 바르게 야단치며 자식들의 선을 위해서 하는 행위입니까? 예수님은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하다 할지라도 네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거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을 주실 것이다. (마태 7,11 참조).
하느님은 아버지시며 아버지답게 행동하십니다. 아들이 죄 중에 있다 해도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그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그분은 절대로 악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죄인은 스스로를 단죄하면서 자신에게 해를 입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면서 정의를 보이십니다. 성자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졌고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지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 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ㄴ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로마 3,23-26).
 
하느님 정의의 완성인 예수님
예수님은 하느님의 정의의 완성으로서 예수님의 피의 영원한 계약으로 인해 우리와 연결되신 분입니다. 만약 제가 욕설을 내뱉는 자를 보거나 살인자, 불륜을 저지른 자를 보면 이렇게 말해 줘야 합니다. “당신이 지은 그 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갚아주셨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구하러 오셨다.” 그래서 교황께서는 죽음 후에도  구원의 희망을 전망하신 것이며 고대 유태인의  믿음인 죽음과 공심판 사이에  하느님의 자비의 시간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고대 유태인의 믿음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제들이 기뻐서 춤추는 모습까지도 저는 보았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인류의 극소수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짜 관점을 제공해 줌으로써 거의 모두가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게 하는 사탄의 중압감과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아우구티노 성인은 상당히 많은 거룩하고 바른 말씀을 하셨지만 이 영역에서만큼은 정확하지 못하셨습니다. 베네딕또 16세 교황이 설립하신 국제신학위원회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태아들의 구원 가능성을 토의하기 위해 세워진 위원회의 문서에서는 이런 과거의 신학전반을 장악하고 있던 성 아우구스티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같은 문서에서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신앙에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티모테오에게 이런 서간을 써보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ㅅ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1티모 2,4), 또 계속 이렇게 언급합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1티모 2,6).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자문해 볼 수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의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 뜻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전혀 다른 전망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나약함 때문에 실망하고 그리스도 신앙으로부터 떠나갑니다. 미래에 대한 구원 전망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을 단지 부당하신 분으로 치부합니다. 
윤락녀였던 어머니를 둔 여성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단골들이 너무 많아서 딸인 그 여성까지도 윤락행위로 이끈 어머니였습니다.  그 여성은 윤락 행위 말고는 아는 것이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성에게 어떤 죄를 물어야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비를 얻을 자격이 있습니까, 아니면 벌을 받아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만약 법대로만 행동하시는 분이시라면 세상 누구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이 부분은 우를 도와주는 것으로 앞으로 하게 될 이야기의 서두입니다. 즉, 사탄이 어떻게 인간생활과 인식, 각 개인에게 어떤 방법으로 들어가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방법을 알아내서 사탄이 들어가는 인식의 문을 폐쇄하고 사람들로부터 그를 쫓아내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드러내며,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믿음의 정의가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누구든지 죄를 짓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해줘야 합니다. ‘당신은 죄를 짓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찾고 계시며 구원을 위해 활동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교황 프란체스꼬 1세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강력하게 이런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가끔 누군가는 이렇게 답합니다. “하지만 저는 엄청 죄를 지었는데요.” 우리는 이렇게 답해 줍시다.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지요. 당신의 죄는 모두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고, 당신 보혈로 씻으셔서 모든 죄를 잊어 주셨답니다. 전혀 기억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기 때문에 심지어 최후의 심판 날에도 기억하지 않으신답니다.”  제가 비신자, 무신론자들을 만나서 “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라고 했을 때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주 고집스런 사람들도 이런 말을 들으면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말고 이런 사랑을 알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심이 아니라 진리이시고,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질의응답
사적계시가 존재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계시의 빛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죄는 고통을 낳고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내며 올바름과 사랑을 부정과 무질서로 만들고, 고통을 생산해 냅니다.
인생을 바꾸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연옥영혼들이 당하는 단련은 참으로 큰 고통을 생산해 냅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신비가인 제노바의 카타리나 성녀는 연옥에 관한 환시에 대한 기록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미 천국에 간 영혼들은 이미 지복직관을 누리고 있어서 행복하지만 연옥영혼들은 그 다음으로 가장 행복해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오게 될 지복직관의 행복을 알기 때문이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겪는 단련은 지복직관에 대한 열망 때문에 만들어지는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이 겪는 그 고통스러운 단련은 지복직관의 기대감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기쁨의 고통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연옥에 고통은 있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 생산된 고통이며 불결함에서 거룩함으로 끌어올리는 고통입니다.  이런 변모는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치의 암덩어리를 가지고 있는데, 수술 하면 완전히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마도 당장 수술대 위에 오를 것입니다. 그 수술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완치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감내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희망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란 회칙에서 성령의 관점에서 종말론(Eskaton 그리스어로 미래라는 의미)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죄 중에 죽은 사람 안에는 이미 고통이  존재한다고 언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였던 에뿔로네가 죽었을 때, 고통의 상태에 빠져 들게 되었고, 이런 고통은 죽음 뒤에 겪고 있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몽고의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은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살해당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키우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계속 교육시키면서 자신이 죽었을 때 이를 실행하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징기스칸 본인은 폭력과 잔인성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데 단 한 번도 사랑이나 용서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선을 우선으로  두고 그 다음 행한 악을 따지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죄를 지은이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있어서 법대로 집행하고 적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시고, 부성애의 표현과 죄를 지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려는 자비의 표현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사용하시면서 정의를 실현하십니다. 즉, 이는 교황께서 한 사람 안에 아주 희미한 사랑의 불빛만 있다면 희망은 살아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상당히 잔인하고 야심가였습니다. 어느 날 그의 두 딸이 사위들과 함께 집에서 도망쳐서 요르단에 피신해 친정아버지인 사담 후세인을 전쟁범으로 고발했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이들에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두 딸과 사위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성공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들 앞에 사담 후세인은 권총을 뽑아 들고 먼저 사위들을 죽였지만 딸들은 용서했습니다. 즉 사담 후세인도 일말의 사랑의 불빛이 남아 있었던 것이고 그도 교황님의 말씀처럼 “아직도 희망이 있는”사람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우리 것과는 다릅니다
교황께서는 영원한 벌을 받는 지옥으로 가는 영혼은 자의적으로 기꺼이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한 영혼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알 권리가 있습니다. 징기스칸은 하느님의 자비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들의 정의 기준에 따르면 그런 인간들은 이세상에서도 고통 당하고 죽어서도 고통 당해야 마땅합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이 지상에서 고통 당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영혼들에게 이를 제공하십니다.
교회 인식 속에서 더욱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즉, 하느님은 이 세상의 삶 혹은 저 세상의 삶에서 부성의 정의로 모든 이들에게 당신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아버지로서 단 한번도 당신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자녀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않는 것만큼 부당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좀 전에 언급했던 그간 윤락행위만을 알았던 젊은 자매는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파티를 열고 악단을 불러 어머니의 관을 따라가게 했습니다. 그녀는 윤락녀였던 어머니 외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뒤 회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올바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 신학 안에 하느님의 자비가 결여되어   정의는 단지 판단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지 단죄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있다면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성 요한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전혀 다른 관점입니다.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하신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의 성서적 관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독서 기도 제 3권을 가지고 있다면  성 베르나르도의 편지를 읽어보시면 알겠지만(연중 제 3주 수요일 참조),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위대한 신비가들은 하느님께서 자비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하느님의 자비를 이미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죄인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위에서 말씀 드린 대로 죄인 스스로 자기 단죄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는 다릅니다.  
 
질의응답
교황께서 이런 가르침을 하셨다면 그분께서는 사적 계시를 따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 잠깐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의 본성과 하느님의 신비를 알고 난 뒤,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교황께서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시키시려고 이 점에 관심을 보이고 난 뒤 모든 다른 현실로 눈을 돌리십니다.  이미 우리가 고찰했듯이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는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녀파우스티나의 사적 계시와 루르드, 파티마, 메주고리예 등지에서는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 사적 계시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계시를 기초로 이런 사적 계시들을 따릅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도 예로 들었는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들 중 한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성녀는 이렇게 언급합니다. “저는 지옥에서 조차 당신의 자비를 봅니다. 주님, 모든 벌을 달게 받아 마땅한 저들에게 조차 그것을 다 주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대해서 사제들께서 좀더 깊이 숙고해보시도록 권장해 드리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과 성령의 영광에 대한 잘못된 사고는 우리 사제들을 과오로 빠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분명한 진리처럼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상태로 우리 신앙의 근본이 되는 하느님의 자비의 영원함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언서 호세아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호세 11,9).
하느님은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분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코린 5,19).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셨고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로지 자비만이 흘러나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그분의 자비입니다.  베네딕또 16세 교황은 단죄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알고 난 뒤 그 자비를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의 충만한 자비를 알았습니까?
만약 신자들조차 여전히 하느님의 말씀을 모른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도대체 뭐라고 해야 좋겠습니까? 메주고리예의 성모님의 다정한 말씀을 이해해봅시다.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공의회 이후많은 이들이 대단히 큰 과오를 범했던 이유는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의 구원을 원하시고 많은 방법들이 있다고 하면서 복음화는 더이상 필요없는 것이다, 혹은 선교증진도 필요없다, 영혼구령을 위한 기도도 필요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 활동이 축소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회교신자 한 명이 카톨릭 교회로 개종하고 싶다면서 어느 주교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교님은 꼭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없고 각자의 종교를 믿으면서 그 종교가 가르치는대로 잘 살면 된다고 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로로 얻게된 구원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정면으로 배척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지키고 사랑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언급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 2 티모 1,9-10) 복음화가 없다면 사람은 은총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사랑하셨고, 영원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은총은 영원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집을 뛰쳐 나가서 부모는 도통 소식을 알수 없다고 한다 할지라도 그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집을 나가도 부모는 사랑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신비를 우리는 묵상할 줄 알아야 하고, 하느님의 진리의 빛 속에서 교리를 재인식해야 하는 것이지 인간적인 사고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리는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더욱 잘 이해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천국이냐, 연옥, 혹은 지옥이냐일 것이지만 교황께서는 이런 최종적인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자비의 시기가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그런 관점은 책벌을 우선시하고 희망을 배척하는 것으로써 완전하게 그리스도교답지 않습니다. 교황 베네딕도16세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란 회칙을 쓰시려고 했던 이유가 교회안에서 건강한 신학으로부터 재출발한 기초를 재설정하시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질문자의 질문 내용이 녹음되어 있지 않아 강연자의 답변만 번역함.
 번역: 남기옥 마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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